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직접적인 동기는 1938년대에 조명암씨에 의해
「서귀포칠십리」가 노랫말이 지어졌고, 박시춘 작곡, 남인수의 노래로 불려지면서 부터이다.
당시 일제치하에 억눌려 살았던 국민들에게 끝없는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을 이끌어 내면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서귀포칠십리"의 사실기록은 1416년(이조시대 태종16년) 안무사 오식(吳湜)에 의해 제주도 행정구역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으며, 1423년(세종 5년) 안무사 정간(鄭幹)에 의해 정의현청(고성)이 현재의 표선면 성읍마을로 옮겨지면서 70리의 거리적 개념이 싹트게 되었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에 의해 발간된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는 정의현청에서부터 서쪽 70리에 있으며, 원나라에 조공을 바칠 때 순풍을 기다리던 후풍처였다고 전하고 있다.
서귀포칠십리가 처음에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현재의 성읍마을에서 서귀포구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개념이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서귀포칠십리가 단순한 "거리개념"이 아니라, 제주도민의 마음속에 언제나 안식과 위로, 그리고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이어도"처럼, "서귀포칠십리"라는 의미 그 자체가 서귀포시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이상향이자, 서귀포의 아름다움과 신비경을 대변하는 고유명사로 자리잡혀 왔다.
이를테면, 서귀포칠십리는 "서귀포의 뿌리와 정서, 이미지"를 함축한 발전된 개념으로 정착되어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고향"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