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용이 어릴적 자라난 생가
-『인동차(忍冬茶)』정지용
노주인의 장벽(腸壁)에 /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물이 나린다. /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 도로피어 붉고 / 구석에 그늘지어 /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 산중에 책력(冊曆) 없이 /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시속의 노인은 세상을 피해 초가삼간 흙벽 속에서 무시로 인동차를 마시며 지내는 사람이다. 방에는 자작나무 숯불이 화로에 발갛고 그 훈기로 한쪽 구석에는 무우의 순이 파랗게 돋는다. 훈훈한 김에서도 흙냄새가 감돌고 밖에는 바람이 치는 엄동. 세월이야 어차피 흐르는 것, 달력은 봐서 무엇 하랴. 세상은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였고...”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중에서)
시인 신경림은 그의 책 ‘시인을 찾아서’에서 정지용의 시 ‘인동차(忍冬茶)’를 간단한 해설과 함께 소개하며 “얼마나 맑고 깨끗하고 높은 삶의 자세인가”, “동족상잔의 진흙 밭에서 뒹굴기엔 역시 지용은 너무 고고하고 도도한 시인이었다.”라며 정지용을 회고한다.
시인 신경림이 흠모해 마지않는 정지용은 6 · 25발발 와중에 갑자기 행방불명되고 그후 정부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해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도 금지시켰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서야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 해금조치 직후 정지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용회’를 만들어 모임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지용 생가는 비로소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른다.
1996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는 정지용 생가는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위치한다.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면으로 길을 잡아 청석교를 건너면 ‘향수를 새겨 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정지용 생가이며, 생가 앞 청석교 아래는 여전히 ‘향수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모습은 변한지 오래이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아 맑기만 하다.
정지용 생가는 방문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었음을 가구(家具)로 알리고 있으며, 시선가는 곳 어디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않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향수의 시어 따라 방안에 배치된 소품 질화로와 등잔은 자연스럽게 ‘향수를 다시금 음미하게 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는 두개의 사립문이 있다.
하나면 족할 것을 두개씩이나 문을 낸 뜻은 방문객의 동선을 고려하여, 또는 한 개의 문으로 드나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또 생가의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하니 물레방아 쪽 사립문은 텃밭 드나드는 용도로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전통가옥구조 중 담 넘어 텃밭이 있으면 그곳으로 쪽문을 내어 텃밭을 일구는 경우가 있으니 그렇게 생각 한들 별반 문제는 없겠다.
정지용 생가에 간다면 이 두개의 사립문 중,
물레방아 옆의 ‘텃밭사립문(그냥 이렇게 부르고 싶다)’ 풍경을 눈여겨 볼 일이다.
사립문 언저리에 까치밥 남아 있는 감나무의 풍경은 정지용 생가인 초가와 잘 어우러져 초겨울 고향의 운치가 더욱 살아나는 곳이다.
정지용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퇴칸 구조이다. 생가의 전체적인 형상은 ㄱ‘자 집이며 마주보이는 방향으로 정면3칸 측면 1칸의 ’一‘ 자형 창고가 있다. 주거용의 ㄱ‘자 집은 부엌 뒤로 방 1칸을 더 내어 ㄱ‘자를 이루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 방은 뒤란 담 쪽으로 분합(分合)문이 나 있으며 방 안쪽에 안방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데 길이는 5미터정도이며 꼭 사람하나 지나갈 만큼 좁다. 양쪽 방을 오갈 수 있는 이 통로는 양쪽 방에 문을 달아 폐쇄형이다.
굳이 그 이유를 유추(類推)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전통 가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내외벽(內外壁)의 유래를 들 수 있는데 실제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옛날 반가(班家)에서는 옥상옥(屋上屋)처럼 담장 안에 담을 만들어 내외벽을 쌓았는데, 그것은 여인들을 배려한 특별한 공간이었으며 안사람에 대한 예의를 중시 했던 우리네 풍속이었다. 정지용 생가의 방과 방 사이의 소통로는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내외벽을 언급해 보았다.
전통적으로 내외가 엄격 했던 우리나라의 경우 반상(班常)의 구분 없이 금남(禁男)의 구역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부엌이다. 부엌은 여성만의 활동영역이었으며 동시에 취사와 난방을 위한 목적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민가에서는 정지용 생가의 부엌처럼 땔나무와 불쏘시개를 보관 할 수 있는 창고의 용도로 일부 사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정지용 생가의 부엌구조는 민가의 일반적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엌 문 옆을 본다면 돌절구, 나무절구와 공이가 놓여있는 자리 언저리, 이곳이 정지용 생가임을 알리는 표시판을 또 하나 만날 수 있다. 이 표시판은 정지용의 모습과 함께 그의 태어난 년도와 날짜, 생가가 언제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지어졌다는 내용을 동판에 돋을새김 하고 있다.
생가 바로 옆으로 지용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