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로 돌아드니 삼대삼미(三大三美)의 땅 이어라!
(구례구역~오산 사성암)
섬진강은 이제 가을을 달리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있다면 코스모스와 황금들판이리라!
여기에 철모르는 아이들이라도 뛰어논다면 천국의 그 어느 곳과 같지 않을까?
강의 흐름을 느껴보기 위해서 구례교위에 나는 서 있다.
아직도 시골의 다른 역들에 비하여 구례구역은 성업 중이다.
즐비한 택시들, 회전식 교차로, 간이음식점들...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위한 등산객들이 배낭을 메고 바쁜 걸음으로 달린다.
구례구역은 사실 순천시 황전 땅이다.
그렇지만 이를 황전역으로 부르지 않고 구례구역으로 이름을 달게 했다.
전라도 사람들의 후한 인심을 느낀다.
나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구례역이라고 하지 않고 구례구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절묘하다.
이 역 하나에서도 배려와 상생의 철학을 배운다.
다리 위에서 역이 있는 구례구역쪽을 바라보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마치 달라이라마로 상징되는 티벳의 어느 동네를 보는 듯하다.
강을 등지고 강과 연하여 서 있는 허름한 건물들이 내겐 꼭 그렇게 다가온다.
잘난 척 폼 잡지 않고, 어느 누구를 향하여 근엄하지도 않은,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상대를 향한 경계심리도 놓이는 법이다.
사람이 쉬어가듯이 이곳에서는 강물도 잠시 지체를 하는 듯하다.
하얀 모래톱이 옷깃을 끌어당기는 듯 강물은 느린 걸음이다.
그러나 속도의 상징인 KTX가 구례구역을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그는 경적도 한 번 울리지 않고 싸늘하게 북쪽으로 내달려 버린다.
구례구역을 통과한 강은 잠시 몇 걸음 흐르다 황전천을 영입하더니
기역자로 꺾이듯 방향을 구십도로 틀어버린다.
마치 자동차가 급커브를 강하게 돌아설 때처럼
강물도 오른쪽 가장자리로 급하게 쏠리는 느낌이다.
이내 균형을 잡고서니 당나귀처럼 쫑긋 귀를 세운 산이 개선문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 한쪽귀가 병방산(丙方山)이고 또 다른 쪽은 오산(鰲山)이다.
이 둘은 마치 섬진강의 흐름을 엿들어 보려는 듯 고개를 강으로 숙이고 있다.
굳이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병방산은 길한 기운을 풍겨낸다.
높이는 160미터에 불과하지만 지리산의 혈(穴)이 모인 자리임에 틀림없다.
그 자태가 웅장하고 고고하다.
오산은 이미 입소문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었다.
정상까지 가는 유일한 방법은 셔틀버스를 타는 것이다.
쉬지 않고 사람들을 542미터의 정상까지 실어 날랐다.
뒤를 돌아보니 뽀얀 먼지를 내면서 달리는 모습이 꼭 옛날 신작로를 연상케 한다.
한번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것이
요새 생겨난 풍토다.
이미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원시림과 같은 산림을 파헤쳐 놓았다.
이러다간 이곳도 며칠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옛 구도자들이 이것을 보았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미 나는 오산의 정상에 서 있다.
마치 새가 내려앉은 듯 귀암괴석 위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
저토록 위험한 곳에 있어야 할 이유라도 있을까?
원효, 도선국사, 진각, 의상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는 암자다.
그렇지만 사성암 앞에 서고나면 이런 의문들이 한 번에 가신다.
한 눈에 들어오는 나선형의 강줄기, 손에 잡힐 듯 서 있는 지리산 노고단,
노란 아라비아산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구례의 질펀한 황금들판, 바로 이것이다.
알고 보니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셋을 일컬어 천하 삼대삼미라고 했단다.
세 가지 크고 아름다운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삼대삼미를 구례가 소유하고 있으니 구례는 천하의 복 받은 땅임이 틀림없다.
그 보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오산과 사성암은 또 어디에 견줄 수 있겠는가?
섬진강은 참으로 묘하다.
구례구역에서 순천만으로 내려 꽂이는 것이 정상일 진대,
황전 땅에서 그 급한 꺾임의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던 이 일로 구례와 하동을 적셨고,
이 두 곳은 섬진강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복 받은 땅이 되어버렸으니
섬진강에게 큰 절이라도 올려야 하리라.
구례들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빚어낸 조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에서 수 만년 동안 생성된 묘약들과
섬진강의 범람으로 유출시킨 명약이 구례들에 쌓이고 쌓여
이 세상 최고의 토질을 형성시켰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까지도 다듬어 놓았다.
가끔씩 구례사람들과 만나보면 그들의 마음씀씀이가 옥토 같다.
오후들판에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에 들판이 마치 황금을 깔아 놓은 듯 빛난다.
오산에서 뛰어내려도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을 것 같은 포근함이 나를 감싼다.
노고단이 손에 잡힌다.
그는 서부지리산의 사령관 격이다.
그러나 언제 봐도 그는 호령하는 법이 없다.
없는 듯 있고 포근히 구례들을 품고 섬진강을 감싸 안을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운명이지 않을 것이 있을까?
섬진강이 황전에서 휘감아 돌아 구례로 급하게 내 달린 것은
삼대삼미의 땅을 이루기 위한 하늘의 조화이리라!
섬진강이 황전에서 휘감아 돌지 않았다면,
노고단을 필두로 하는 서부지리산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구례들도 형성되지 않았을 터이고 오늘 우리가 즐기는 삼대삼미의 절경도
이 세상 것이 되지 못하였으리라!
이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산인 오산,
비록 한 뼘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난장이 병방산이
지리산의 혈이 되어 서 있는 것도 운명이리라.
큰 산이 작은 산 되고 작은 산이 거산이 되는 이치를 오산에 서면 깨닫는다.
거산인 노고단도, 육 백리의 섬진강도, 수백 만평의 구례들도
그 누구도 나를 앞세우지도, 내가 크다고, 내가 아름답다고 자랑치 않는다.
오히려 낮고 작고 느림의 절묘한 조화 속에서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어 보인다.
이제 섬진강이 구례장을 스쳐 지난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