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임파서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구하라
<2>
최정철 / 문화기획자 축제연출가 & 現수원화성문화제예술감독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성균관, 그리고 석전대제
그러나 미안하게도 우리는 이 석전대제를 우아하게 내놓고 자랑만 할 처지가 전혀 아니다. 왜 그러느냐,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썩은 내가 진동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 이 석전대제가 안고 있는 현재 시점의 문제들을 점고할 것인데, 그 전에 먼저 성균관이라는 조직을 살펴봐야 한다. 성균관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관장 이하 숱하게 많은 부관장들이 득시글거리고 그 밑에 석전대제보존회라는 조직이 있으니, 이 조직이 바로 석전대제를 관리하는 전수기관이다. 관장 이하 관장바라기 부관장들, 그리고 석전대제보존회의 막강한 트라이앵글 체제 하에서 석전대제는 어느 누구도 넘보기 힘든 철옹성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04년 최OO 관장이 취임하면서 성균관은 이때부터 부패의 길을 걷는다. 일단 최OO 관장은 열 명 안팎의 부관장들을 수하에 두었다. 이들은 용모가 단정해요, 일기를 참 잘 써요, 혹은 청소를 잘 해요, 하는 모범생이어서 부관장 시킨 것이 아니다. 관장이라는 자가 헌성금을 받고 그 자리를 판 것이다. 이 헌성금도 일종의 발전기금 성격일 것인데도 관장 개인 주머니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다름 아닌 매관매직이었다.
여기에 탄력 붙은 최OO 관장은 이제 곧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니, 바로 유교의 종교화 선포다(그래야 해마다 국고 8억 원씩 쉽게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고서는 석전대제를 공자의 탄강일과 기일에 시행함으로써 ‘공자교’의 종교 행사로 용도변경하고 만 것이다. 석전대제를 공자 탄강일과 기일에 시행한다는 것. 이것은 하늘이 진노할 대단한 오류다. 원래는 이팔상정일(二八上丁日. 음력 2월과 8월의 첫 번 째 丁日)에 맞추어 봄가을 연 2회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기에 탄강일과 기일에 시행하는 것은 당연히 틀린 것이다. 그럼에도 관장이하 석전대제보존회는 2007년부터 석전대제 시행 날짜를 공자 기일(음력 4월 11일)과 탄강일(음력 8월 27일)의 양력 환산일인 5월 11일과 9월 28일로 대못 박듯 정하고 말았으니, 곧 이팔상정일을 완전히 배제한, 원형을 걷어찬 의식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백번 양보해서 음력 8월 상정일 대신 탄강일을 추계 일정으로 인정한다 해도 5월 11일을 춘계로 설정한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이때는 입하(음력 3월 22일)를 훌쩍 넘기는 여름 철 날짜다. 그래서 이즈음 성균관 주변에 마실 나온 동네 워리들도 석전대제보존회 지도부를 계절(철)도 모르는(不知) ‘철부지’라 부르며 조롱하기까지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성균관 조직도>
어쨌거나, 그로써 유교가 공자교로 전락하였으니 전국 234개 향교 유림들이 땅을 치고 아래턱을 떨 수밖에. 이미 말했듯이 이 제사는 겨레의 스승들을 기리는 의식이다. 공자의 탄강일과 기일에는 공자만을 기리는 별도의 의식을 올리면 되는 것이지, 석전대제를 공자만 기리는 의식으로 끌어다 붙인 것은 어떻게 보아도 어불성설이다.
한편, 이런 훈구파들의 시대착오적 행각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자들이 있었으니 곧 석전대제 이수자 중심으로 뭉친 젊은 사림 십여 명이었다. 은인자중 때를 기다리던 이들은 마침내 뜻을 모아 정변을 일으켰다. 이해가 공교롭게도 갑신년이니 김옥균 이후 제2의 갑신정변으로 사초(史草)에 기록 되어 전해진다. 그러나 최OO 관장 이하 부관장과 석전대제보존회 등 훈구파에 의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고 이후 정변 가담자들은 분루를 삼키며 야음을 틈타 성균관을 탈출, 성대 입구 혜화동 정류장에서 151번 버스 잡아타고 조계사 옆 옛 삼양사 터 오피스텔로 망명해서는 ‘석전대제연구회’ 모임을 만들어 길고 긴 야인의 길을 걸어야 했다.
유교는 학문이요 사상이지 종교가 아니다
본론에서 벗어나는 얘기가 되겠지만 생각 좀 해보자. 유교가 종교로 성전환된 것. 민족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대단한 변신이 될 수 있다. 과연 중국 땅에서 발흥한, 그리고 한반도에 유래된, 고금의 그 어느 사상과 학문 중에 훗날 종교로 변신한 것이 있는가? 20세기 초반 활동했던 중국 사천성(四川省) 출신의 리쭝우(李宗吾)는 난세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며 후흑(厚黑) 사상을 설파하다가 나중에 스스로 후흑교 교주로 자처한 적이 있다. 당시 후흑 사상은 중국 역사를 관통해서 내린 명쾌한 지적과 탁견들로 이루어져 일반인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너무 과격하다는 이유로 식자들로부터 비난과 야유를 받았다. 리쭝우가 교주참칭을 한 것은 제도권의 백안시에 대항하기 위한 오만의 발로였던 것이지 실제로 후흑 사상을 종교로 포장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상향을 내세우며 종교로 출발한 사상은 있어도(중국의 태평천국교, 조선의 동학, 대한제국의 대종교 등) 현실참여적인 유교와 같은 사상들은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반도의 유교가 기천 년 동안 겨레의 중심 사상으로 흘러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종교로 재탄생된 것. 이것은 곧 민족의 문화 자산을 성균관 지도부가 사유화한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유교 사상과 그 문화가 현대에 이르러 비주류로 밀려났다는 현실을 깨달은 한국 유림이 그 계승 보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전략적 선택(국고가 탐나서 그런 건 아니고?)을 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대중의 곁을 떠나 쇄교(鎖敎)의 길을 걷는 것이다.
종교가 된 한국 유교. 그리고 졸지에 교주가 된 공자. 공자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언젠가 찾아가서 “예(禮)라는 건 무엇인지요?” 물었을 때 “것두 몰라서 왔냐? 손바닥 대!” 타박만 주었던 노자를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장탄식을 하며, “도대체 종교가 뭔지요?” 징징댈지도 모를 일이다.
폐언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해보겠다. 과연 이 땅의 석전대제가 옛날부터 성균관 것이었는가? 절대 아니다. 국가의 중요 행사로 성균관의 문묘 공간을 빌려서 치렀을 뿐, 당연히 국가 정부가 주인이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식민 통치가 시작된 이후 전국의 유림이 힘을 모아 제사의 맥을 유지했으나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다시 국가의 품에 안겼다. 어려운 와중에 성균관이 성실하게 명맥유지를 잘 해온 것에 대해서는 경의를 보내야 하겠지만 이제는 성균관이 그 철옹성 같은 아집과 주인 의식을 양보해야 한다. 그래서 성균관만의 사업이 아닌 국가적 민족적 사업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석전대제의 원형과 본의가 제 숨을 쉬게 되고, 성균관 또한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