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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서 온 편지 (23)
더페스티벌    2011-06-26 죄회수 4,096 추천수 2 덧글수 3  인쇄       스크랩     신고

 

(신원리 섬진강산책길, 아침일찍부터 섬진강에 낚싯대를 드리우네요. 될려나?)



그러면 그렇지! 장마가 그렇게 빨리 오던가요?

“6월 9일 장마내습”은 기상대의 “뻥”이었나 봅니다.


때론 너무 정확한 기상대 일기예보는 삭막하고 인정이 없어 보입니다. 약간은 빗나간 일기예보가 인간다운 일기예보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늘의 일을 우찌 사람이 다 알겠습니까?

나의 숨겨둔 산책길, 신원리 섬진강변길.... 섬진강에서 올라온 ‘똥게’와 눈 마주치고 한참 서로 기죽지 않고 눈싸움 할 수 있는 곳, 멍청한 재첩이 강변에 올라와 눈 껌벅껌벅하면서 일광욕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곳, 오로지 혼자인지라 뛰고, 노래 부르고, 넋두리해도 방해되지 않는 곳, 때론 긴급상황이 발생, 실례를 해도 전혀 두리번 거릴 필요가 없는 곳,


최첨단을 달리는 허수아비가 전국 들판을 주름잡지만 딸랑, 대나무 막대기에 스티로폼 박스 하나 엎어놓은 바보허수아비로도 어지간한 새들을 홀릴 수 있는 곳. 콘크리트 포장이 되지 않아 발걸음 뗄 때마다 ‘사각 사각’ 흙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가을에는 백운산 넘어가는 일몰이 섬진강 갈대와 절묘하게 조화로운 곳,


아! 이보다 더 편안한 길은 없다. 이보다 더 멋진 산책로는 없다.


저만의 숨겨 놓은 섬진강 다리건너 전라도 광양시 신원리 강변길....

 

(하동군청 건널목 대장님, 대통령도 이분한테는 꼼짝 못합니다. 서라면 서야지요)



완행열차가 떠나려 합니다.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 보셨습니까?

못타보셨다면 소중한 추억 하나는 영원히 건질 수 없어 보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비둘기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랐던 동네 두전(豆田)마을은 철길이 동네를 두 동강 내고 동네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바람에 기차길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근대문명의 상징인 철길과 기차를 일찌감치 볼 수 있었다는 자랑이었고, 또 하나는 동네를 동과 서로 갈라놓아 심리적으로 양분되게 한 분단의 아픔입니다.


제가 살던 집과 기차길과의 거리는 불과 30미터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기차와 호흡하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전선철도가 개통된 것은 우리나라가 아직 산업화를 시작하기 전 1968년도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동네 어른들은 철길공사장에서 노역을 하고 돈을 벌었습니다.


하루의 일이 마칠 저녁 무렵이 되면 호롱불 들고 부모님을 마중 나갔습니다. 당시 "오다마"로 불렸던 사카린 덕지덕지 발린 사탕을 선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을 마치면 인부들에게 수고의 댓가로 지급되었던 것 같았는데 막내라 늘 사탕은 저의 차지가 되었지만 작은 입에서 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의 큰 오다마를 넣고 즐거워했던 일이 어제 같습니다.


철길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조차 놀이터이자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여름밤이면 철길 옆에 멍석을 깔고 목개불 피우며 한여름 밤을 보냈고 아이들은 레일을 걷거나 철길위에 못을 얹어 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숨죽여 지켜보던 그 스릴..... 혹시 기차가 탈선이나 하지 않을까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고백하는 것이지만 주먹만한 돌맹이를 얹어 놓기도 했었습니다. 헤헤, 다행히도 기차는 돌맹이를 가루로 만들거나 튕겨내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달렸습니다.




읍내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저는 거의 6년을 철길을 통해 등하교를 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막차를 탄 지라 작은 동네에 동갑내기가 열다섯 명이나 되었을 시대였던 만큼 등교를 하는 아침 철길은 검정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했었습니다.



터널을 지날 때에는 완전 스릴만점입니다.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치는 날의 하굣길의 터널은 두려움에 떨면서 터널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천둥번개가 레일을 타고 들어오는 느낌, 터널 천정에서 뚝뚝 떨어지는 주먹만한 물방울을 맞을 때의 그 싸늘하고 무서웠던 촉감... 혹시 기차라도 만나는 날이면 걸음아 날 살려라... 대피소를 향해 뛰어야 했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혼자 가는 길은 더더욱 무서웠습니다. 그 해결책은 고함과 노래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음향시설이 완비 된 극장이나 공연장에 선 느낌이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터널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얼마 전에 말씀드렸던 꽂다니재에 대한 무서운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꽂다니 재에는 젊은 여자 귀신이 입에 칼을 물고 서 있다!!!"

실제로 그것을 봤다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누군들 그 재를 넘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철길에는 강력한 지배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선로를 보수하는 "선로반"이었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당시 친구들끼리 내린 결론은 "순경보다 선로반이 더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철길 위를 손으로 저어 다니는 손수레 같은 것을 타고 오는 선로반이 나타났고 "야, 선로반이 온다.... 도망가자!"

한참동안 선로반이 지나가기를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철길을 통해 등하교를 하는 동네 형님, 누나들을 잡기 위해 선로반들이 날뛰던 사건을 잘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중학교 때에는 등교를 할 때 선로반에 집단으로 잡혀 학교에 넘겨졌고 단체로 기합을 받기도 했던 정말 아름다웠던? 추억이 있습니다.

(철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역 앞에 있는 여로다방에서 꼭 다방커피 한잔 하시고 가이소!)



입영열차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추억은 철길 옆에서 최신 물질문명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형님 뿐 아니라 동네 형님들, 그리고 자식을 군대에 보내야만 했던 저 멀리 골짜기 마을의 부모님들은  입영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철길로 모였습니다.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열차가 나타나고 기차는 수십 칸의 객차를 달고 느린 속도로 달렸습니다.


기차의 꼬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는데 제가 본 열차 중 가장 길었던 것은 이 때 봤던 입영열차였습니다. 동무들과 앉아서 누가 더 정확히 세나 내기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진주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논산까지 갔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동네 형님들이 빡빡머리로 객차안에서 손을 흔들고 부모님들과 동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몸 성히 잘 댕기오이라!"라고 외치며 환송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군기가 쎄지 않았던 시대에 군대를 갔었는데 부산 동래역에서 논산까지 가는 입영열차를 탔었습니다. 어떻게 기차가 빨리 달리던지 ... 좀 천천히 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4년간은 진주에서 하동으로 주말마다 통학을 했었습니다. 자칫짐을 싸들고 집을 떠나 진주로 첫 이사를 가던 날, 살 밖에 나와 계시는 엄마를 보자 왈칵 눈물이 쏟어졌습니다.


그것도 객지라고, 그것도 떠난다고 .... 스쳐지나 가는 동네와 엄마가 왠지 서럽게 보였습니다.



그랬던 기차가 이젠 떠나고 있습니다. 불과 40여년 만에 좀 먼 길로 떠나고 있습니다. 새로 경전선 복선화사업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우리 동네 뒤를 가로질러 철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뒷산에 새로운 터널이 생기고 전에 보지 못했던 대규모 고가도로는 마치 옛 고대 로마의 대형 수로처럼 웅장하기 그지없습니다. 동네가 두동강이에서 세동강이로 나야만 하는 형편입니다. 생활 속 깊이 파고 들어왔던 철길이 속도밀착형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동네사이로, 들판사이로 낮은 모습으로 달리던 열차는 앞으로 불과 몇 년이면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날렵하게, 맵시가 모던하고 "까도남형" 열차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게 될 것입니다. 인간성이 배제되고 사람과의 친밀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며 빨리만 가면 장땡이인 열차만 보게 될 것입니다.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줄 여유, 철길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정, 완행열차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던 정담, 차표를 파는 아저씨들과 나눴던 눈인사, 그 어떤 작은 간이역이라도 정차해서 사람을 실어가던 배려, 열차 안에서 차장의 표검사와 "딱딱" 소리가 났던 검표기..


"계란, 사이다, 땅콩..."하며 코맹맹이 목소리로 이동매점을 운영했던 "홍익회"의 판매원....

다 추억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오늘 날 열차에는 인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오로지 광속으로 달리는 속도에 나를 맡기고 목표점에만 빨리 도착만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동네앞으로 살짝 스쳐 지나가는 철길, 이런 정겨움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박해수 시인이 쓴 "죽도록 그리우면 기차를 타라"는 시가 있습니다.


삶이 역이라면 좋겠다

사방팔방으로 가도 좋으니까

마음 헛 짚어

역마살이 끼어

이리 해매고 저리 해 매어도

역은 항상 역으로 거기 그 자리…


상처받은 가난한 마음의 행로여

내 마음의 행군이여

이 저녁 역으로 가는 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역마살을 남기고


죽도록 그리우면 기차를 타라



그러나 이젠, 역은 항상 역으로 거기 그 자리가 아니며 죽도록 그리울 수도 없습니다. 아니 죽도록 그리워도 그리워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를 받아 줄 간이역도, 꾸불꾸불 돌아가는 모퉁이 기찻길도, 다정다감하게 인사 나누던 차장도, 검표원도,  무서웠던 선로반도 .... 그 어느 곳엔들 품어주고 맞이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적어도 앞으로 새로 생길 철길에는 그렇습니다.


고향역, 비내리던 호남선, 남행열차, 이별의 부산정거장 ... 이런 노래들은 오로지 노래로만 남을 뿐입니다. 철길이 왕복으로 생기고 고속화되고 KTX니하며 괴물처럼 생긴 열차가 두어 시간 만에 서울에 나를 실어준들, 그만큼 나의 삶이 더 윤택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단지 속도속의 기계로, 부속품으로, 프로그래밍된 "호모 스피드족"으로 탈바꿈 되어 버렸습니다.


동네를 가로 질러 아담한 동네를 두동강이로 내 버렸던 철길, 그러나 당시엔 그 누구도 철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숙명으로, 생활의 일부로 생각했었습니다. 밤낮으로 경전선철도 복선화공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동네사람 그 누구도 철길공사장에 가서 돈 번다는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다이나마이트의 폭음으로 소가 사산을 하고 임신을 하지 못했다거나 지붕이 갈라지고 담벼락에 금이 갔다는 하소연 뿐 입니다.


아! 이 일을 누구에겐들 하소연 하겠습니까? 세월이 바뀌어가고 있는걸요.


멋 훗날, 지금 생기고 있는 고속철도도 또 다른 추억거리가 되어 있지 않겠는지요? 세월은 또 다른 추억을 낳고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가 봅니다. 하지만 그 추억이 그 추억은 아마 못 당할 겁니다. 죽어도 !!!


야간열차를 타고 목포엘 가 보고 싶습니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도 만나고 유달산에도 가 보고 싶습니다. 까도남 처럼 생긴 모던한 기차가 새 철도를 점령하기 전에 말입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


 

태그  하동 조문환, 섬진강, 신원리강변길, 하동역, 여로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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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2011-06-27 17:48 수정삭제답글  신고
나도 섬진강에서 올라 온 똥게와 눈을 마주치고 싶다.. ^^
글 잘 읽었슴당!!
할미꽃F3   2011-06-27 01:56 수정삭제답글  신고
"비가 오는 날 꽂다니 재에는 젊은 여자 귀신이 입에 칼을 물고 서 있다!!!"
**&&()^^%%$ 에구~ 끔찍하여라,,, 살이 돋는고나~^^

qwan   2011-06-26 15:47 수정삭제답글  신고
섬진강 다리를 건너 기차여행을 해 보고 싶다. 죽도록 그리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움으로 죽어가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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