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제고개 전설이야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 만날고개 일원 마산합포구 현동과 월영동의 경계에 위치하여 내서면 감천곡(甘泉谷, 감천골)으로 통하는 고개가 만날고개인 바 옛부터 보행이 많은 곳이다. 고려 말엽 마산포(馬山浦)에 양반 이씨 가문이 있었는데, 편모슬하에 3남매가 자라고 있었다. 자식이라고는 큰 딸이 열일곱살이었고 열서너살의 둘째 딸과 열살 남짓한 막내아들이 있었으나, 대주가 고질병으로 방에 눕게 되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감천골에는 금전으로 진사 벼슬을 얻은 윤씨댁이 살고 있었다. 윤진사댁은 천석꾼 부잣집으로 슬하에는 서른 살 쯤 되는 외아들의 혼사를 위하여 사방 곳곳에 혼사처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아들이 반신불수에 벙어리였기에 좀처럼 혼처가 나타나지 않았고 한 해 두해 아들의 나이만 먹어가니 초조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포에서 시골로 행상을 다니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이 아주머니는 이씨 가문의 이웃집에 살고 있었으므로 평소에 이씨 가문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아주머니는 행상을 다니면서 감천골 윤진사댁 외아들 혼사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들은지라 어느날 이씨 가문의 어머니를 찾아가, 열일곱살 난 큰 딸 아이가 윤진사댁 외아들과 혼사만 이루어지면 전답 수십 두락(斗落: 마지기)과 많은 금전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큰 딸 아이의 결연(結緣)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씨 가문의 어머니는 아무리 우리 가정이 구차하고 내 병이 낫지 않더라도 병신한테 내 딸을 줄 수 없다고 한사코 거절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에 행상 아주머니는 큰 딸한테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서 허락을 받아 보자는 생각을 했다. 행상 아주머니는 며칠 후 이씨 가문의 큰 딸 아이를 만나서 좋은 혼처를 중매할 것이니까 허락을 하라는 것이다. 이씨 가문의 큰 딸 아이는 혼처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행상 아주머니는 윤진사댁과 혼사만 이루어진다면야 너희집 가세(家勢)를 세울 수 있고, 어머니 병환도 고칠 수 있다고 하면서 감언이설로 중매쟁이 역할을 하였던 것이었다. 이씨 가문의 큰 딸은 어머니께 혼사문제를 허락하도록 말씀을 여쭈었으나 어머니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큰 딸은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불효이지만 가세를 위하고 어머니 병환을 고치는 것이 자기의 소망이어서 혼인할 것을 결심하고 행상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부탁을 드렸다.
그해 봄 이씨 가문의 큰 딸 처녀와 감천골 윤진사댁 외아들 벙어리와 혼사가 이루어졌다. 병석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와 어린 두 남매를 두고 시집길에 나선 큰 딸은 수많은 애환과 시련을 각오하고 만날고개를 넘어 감천골 윤진사댁을 향했다.
남편인 반신불수 벙어리는 남자다운 행세를 못할 뿐만 아니라 시부모는 윤진사댁 외며느리에게 가혹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게다가 손자를 낳지 못한다고 구박과 성화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며느리는 시종여일(始終如日) 시부모와 남편 시중을 잘 받들었다. 며느리는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항상 친정집을 걱정하면서 안부라도 알고 싶었지만, 여자는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이니 친정하고는 거리를 멀리 하라는 것이었다. 시집을 가면 형편에 따라 1년 내지 3년이 지나면 근행이라 하여 친정에 보내는 옛 풍습에 따라, 윤진사댁 며느리는 친정어머니 병환과 어린 자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시집살이 3년 만에 시부모에게 근행할 것을 요청하였던 바, "외간 남자를 보러 갈 것이냐"면서 온갖 험담과 야단만 하는 것이었다. 벙어리 남편은 아내를 앞세우고 만날고개까지 동행하여 빨리 친정에 다녀오라고 하면서 만날고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진사댁 며느리는 곧장 뜀박질로 친정에 와 보니 시집 갈 때 받은 금전과 전답으로 어머니의 병은 완치되었고, 가세는 호전되어 있어 마음이 한량없이 기뻤다. 그런데 시집살이 사연을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돌아가지 않을 것을 여쭈었더니 호통을 치면서 빨리 시가로 돌아가라고 야단이었다. "여자는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한 번 시집가면 죽을 때까지 시가집 가훈(家訓)에 의하여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달픈 마음을 달래며 곧장 시가집을 향했다.
그러나 만날고개에서 기다리던 남편은 그 동안에 자신의 열등의식으로 인해 자살할 것을 기도하고 머리를 돌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아내에게 "집을 도망쳐 나가 살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곳에서 남편은 죽은 것이다. 아무리 남편이 반신불수의 벙어리였지만 처절한 모습의 남편을 부둥켜안은 아내는 더없는 한이 맺히게 되었다.
스무살의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어 수절(守節)하면서 애환으로 살아가는데, 몇 해가 지난 팔월달 열이래 날이었다. 친정이 그리워서 안부라도 전해 듣고 싶었다. 만날고개에 가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친정 안부나 전해 듣고 친정집 처마라도 멀리서나마 바라볼 겸 해서 선뜻 만날고개로 갔다. 그런데 때마침 그날 친정어머니와 여동생이 시집간 딸의 안부를 전해 듣고 싶어 만날고개를 넘나드는 행인들을 만나러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신의 뜻인지 그렇게도 보고 싶은 친정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게 되어 얼싸 안고 한 많은 정담(情談)을 나누었다.
이곳을 후세대 사람들이 만날고개라 이름 짓고 입으로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매년 음력 팔월 열이렛날이 되면 서로 헤어진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수백명씩 이곳 만날고개를 찾아들어 하루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중과 혹은 산밑에 의거하여 살고 있었다. 가깝고 먼 마을로 가자면 가까운 산을 넘고 다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산고개는 우리 조상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전설도 많은 것이다.
창원에도 산고개에 대한 전설이 많지만 특히 만날고개 전설은 오래전부터 유명하다. 이 고개의 또 하나의 유래는 과거 이 고개의 근처에 살던 처녀들이 시집을 가면 친정으로 와서 처녀 때의 친구들을 만나기 힘들어 일년에 한 번 씩 추석날을 택해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던 친구들이 각각 음식을 해 가지고 와서 서로 나누어 먹으며 과거를 회상하고 시집살이의 회포를 나누었다는 데서 온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와서 만났다고 하여 "만날고개"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