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3대지 8명당 중 하나로 알려진 이중인 선생(李中仁 : 1315~1392년 이후)의 묘는 기흥구 영덕동 산8번지 (속칭 잔다리 마을)에 있다. 봉분은 기단부에 호석을 돌려서 방형으로 조성된 단분 묘(532㎡)이며, 묘소 앞에 혼유석,상석,향로석과 우측에 묘표(墓表)가 장대석 위에 있고, 그 아래 가운데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양석(羊石),복두공복형(僕頭公服形) 문인석 및 동자석이 있다. 묘표 음기에 의하면 17051년(숙종 31) 선생의 13세손 이세재(李世載)가 경기관찰사로 있을 때 "그동안 훼손되어 있었던 묘소를 찾아 식수와 봉분을 정비하고 묘답을 찾아내 제사를 받들게 하며 묘비를 세웠다"고 하였으며, 그에 앞서 11대손 후산(後山)이 관동절도사로 봉심(奉審)한 바 있고, 13대손 세백(世白)이 우의정으로 봉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구성부원군 이중인 선생은 고려 말 절신(節臣)으로 호는 진초(秦楚), 본관은 용인(龍仁)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중인은 용인이씨 중시조(中始祖)로 고려 태조 왕건(太祖:王建)이 고려를 개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때 용인지역 일대 토호로 큰 공을 세운 용인이씨의 시조 태사(太師) 고려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숭록대부 이길권(李吉卷)의 14세손이다. 선생은 개성 일청재에서 태어나 용모가 단정하고 심지가 확고하여 그대의 흉중에는 진(秦)나라와 초(楚)나라 같이 강함이 있다고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학문을 닦고 덕을 쌓아 문예에 정통하여 일대종장(一代宗匠)으로 이루었고, 벼슬은 고려 충선왕 때 문과 급제 후 봉선고 판관,홍복도감 판관,중서문하성 평장사,판도평의사사 및 문하시중을 지냈고, 충정왕 때 구성백(駒城伯)의 봉호를 받았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고려조의 명신들을 등용하려 할 때 선생에게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구성부원군의 품계를 내리고 자신을 도와 국정을 보필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선생은 나는 고려조의 신하이다.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음이 당연하거늘 어찌 청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며” 고려말의 절신들과 함께 개성 광덕산 서쪽 두문동에 들어가니 세상에서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 부르고 있다. 그 후 이성계의 회유나 위협에 동요되지 않고, 조견(趙絹) 등 여섯 명과 함께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송산(松山)에 들어가 절의를 지키다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