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像)의 형태는 작은 이목구비를 한 통통한 얼굴과 원형 귀걸이·높게 결발(結髮)하고 귀 뒤로 돌아가 어깨까지 내려온 모습이다. 이같은 결발형식(結髮形式) 및 귀걸이 표현은 고려말부터 유행하여 조선초기에는 간략화되었던 표현수법이다. 어깨는 얼굴에 비해 좁고 쳐져서 다소 왜소한 느낌이며, 팔찌를 장식한 오른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어깨에 드리워진 천의(天衣)는 팔을 휘감고 발 아래까지 흘러내렸고,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매듭이 있으며, 양 다리 사이에 수대(繡帶)가 내려져 있다.
이 작품은 15세기 작으로 비정(比定)된 안성청룡사(安城靑龍寺)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이나 파계사(把溪寺) 원통전 관음상(圓通殿 觀音像)보다 결장형식(結髮形式)이나 귀걸이가 간략화 되었고, 신체비례도 5등신 이어서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약수선원 목조보살입상은 15세기의 특징이 남아있는 결발형태나 통통한 얼굴 등에서 조선 중기, 즉 16세기의 작품으로서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더욱이 좌협시(左脇侍)인 동국대(東國大) 소장(所藏) 목조관음보살입상(木造觀音菩薩立像)의 복장기(腹藏記)가 발견됨에 따라 명확한 제작연대와 봉안사찰(奉安寺刹)·조각장인(彫刻匠人) 및 발원자(發願者) 등을 알 수 있는 상(像)이어서 조선중기의 보살상(菩薩像) 및 조각장(彫刻匠) 유파(流派)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작품이다.
※ 이 상(像)을 조사하신 교수에 의하면 이와 똑같은 모습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동국대에 소장되어 있고 복장기(腹藏記)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래의 사찰(寺刹)이 폐사(廢寺)되면서 삼존불(三尊佛)이 흩어졌고, 현재 주존(主尊)은 소재불명(所在不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