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순교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정사박해(1797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수천명의 무명 순교자를 냈다.
해미성지는
생매장 순교지로 유명하다.
당시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천주교 신자 천 명 이상이 생매장당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생매장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여숫골’, 진둠벙‘ 등의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해미읍성은
천주교 신자들을 가뒀던 감옥,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회화나무 등 역사적 아픔과 함께 조선시대 500년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해미를 중심으로 한 서산 지역은 18,9세기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산을 비롯한 내포 지역은 18세기 후반 내포의 사도로
알려진 『이존창』에 의하여 천주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천주교의 유포가 정치문제화 되면서 순교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순교한
『박취득』은 해미에서의 최초의 순교자였다.
이후 해미에서는 수백명의 순교자가 나왔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활발했던 천주교 교세와 관련이
있지만 아울러 내포8현을 관할하던 진영과 감옥이 해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진영의 감옥에 갇힌 천주교들은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 등
갖가지 방법으로 참혹히 처형당하였으며 1868년의 박해시에는 많은 인원을 생매장한 일도 있었다.
해미천 좌우 주변과 진둠벙에서는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 1천 여명이상의 신자들이 팔이 묶인 채로 거꾸로 떨어뜨려져서 생매장 당하였다.
이 순교자들의 유해는 대부분
홍수로 유실되고 1935년에 그 일부를 발굴하였다.
이 일대에서 생매장 당한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에 높이
16미터의 탑을 세웠고 야외 미사장을 개설하였다. 2003년에서는 무명 순교자 성지성전을 신축하여 순례자들이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하여 매년
수만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