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冶) 김좌진(金左鎭) 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으로 고종26년(1889)선원 김상용의 10세손인 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 하였으며 용력이 뛰어나 18세 때에는 이미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그는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8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사관연성부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맞아 7일 동안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3,000여명을 살상하는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루었다.1925년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만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 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 부근의 정미소 앞에서 동지였던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생가지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의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김좌진장군 사당(백야사)은 98~2001년까지 성역화사업 추진으로 2,88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내ㆍ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