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새들은 날기에 지쳐 우리로 돌아오네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라는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60여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다.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누각아래 기둥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특이하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어른(19세이상) 1,000원
*학생(10세~18세)/군경 700원
08시 00분 ~ 17시 00분 (연중무휴)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및 오리미 일대를 1912년께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다.
충청남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각처에서 꽤 지체 높은 양반까지 와서 집을 짓기 시작하여 현재(1929년) 이주해 온 집이 일백여호에 달한다.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비기(秘記)에 말하기를 이곳 어디에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세 진혈이 있어 이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 힘 안들이고 천운이 있어 부귀영달한다고 전해온다. 이 세 자리는 상대上臺, 중대中臺, 하대下臺라고도 하며 하대인 오보교취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 한다.
이곳 제일 오래된 유씨의 집이 오미리에 있다. 그 택지는 유씨(柳氏)의 원조 유부천(柳富川)이란 사람이 지금부터 300년쯤 전에 복거(卜居)한 것이라고 한다. 유부천은 서울까지 밤마다 구름을 타고 왕복할만한 방술에 통한 자였다. 그가 좋은 집의 초석을 정하고자 할 때 뜻밖의 귀석(龜石)을 출토했다. 비기에 이른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땅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