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도 때로는 해맞이를 한다.
(순창군 유등면, 남원시 대강면)
풋사랑과 같은 칠월이 저 멀리서 팔월의 모퉁이로 돌아서려 한다.
칠월에서는 풋내음이 난다.
알알이 다 차지 않은 옥수수,
아직 매운맛이 덜 들어 코를 톡 쏘아 눈물 흘릴 정도가 아닌 풋고추,
그러나 풋고추를 물김치에 돌돌말아 찬밥에 한입 넣기는 지금이 딱이다.
허수아비와 친구삼고 서 있는 참깨는 하얀 꽃만 나부끼고,
영근 깨가 열리려면 아직도 달포는 더 태양에 달구어져야 한다.
겨울의 주식이었던 고구마도 강열한 햇빛에 주저앉아 풀죽은 이파리만 무성하고
감자도 아직은 잎과 꽃뿐이다.
백중 날 부침개에 약방의 감초인 애호박은 아직은 아기주먹 만큼 작고
그 작은 얼굴을 호박이파리에 숨어 살포시 내민다.
내 인생도 이처럼 풋내음 물씬 나는 십대나 이십대가 있었나 싶다.
아직도 마음만은 십대의 향긋한 풋내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고 보니 섬진강에서도 풋내음이 난다.
아직 수박내 나는 은어와 피라미 그리고 버들치...
그 사이에서 물장구치고 노는 아이들 속에서도 풋내음이 풍겨나고
태양이 뜨거울수록 더 날랜 몸놀림을 자랑하는 철없는 고추잠자리도
영락없는 풋 세대다.
하지만 풋내음의 싱그러움도 이제 이틀 후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모퉁이를 돌아설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태양과 씨름해야 한다.
이른 아침이지만 강렬한 태양은 인정사정없이 내리쬔다.
적성강의 끝점인 88고속도로 아래 고뱅이 어살부터가 오늘의 출발점이다.
잠시 적성강이라는 이름으로 흘렀던 강은
다시 섬진강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흐르기 시작한다.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섬진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고뱅이 어살은
조선중기에 대나무로 발을 엮어 강을 쌓고 막아
은어, 참게 등을 임금님께 진상했었던 곳이고,
고반정이라는 정자는
인근 남원, 곡성, 담양 등의 수령 방백들이 모여 시를 읊던 곳이었다.
지금은 정자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고,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유실되었던 어살은
유등면민의 뜻을 모아 십 여 년 전에 복원되었고 은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팔공산 데미샘이다.
차에서 내려 느린 걸음으로 불과 반시간만 걸으면 데미샘에 도달할 수 있다.
팔공산의 높이는 불과 1,142미터, 데미샘은 정상에서도 한참 밑이고 보면
실제 섬진강은 작은 산자락 중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금강의 발원지는 팔공산 아래 그의 조카뻘정도 되는 897미터의 신무산이다.
신무산은 사실 겉으로 보기에 팔공산에 비하면 산도 아닌 산이고
사람들의 입에도 오르내리지도 않는 무명의 산이다.
그러고 보면 금강과 섬진강은 같은 근원에서 출발한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과 금강의 발원지인 신무산은 직선거리로 치면
불과 수 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겉으로 볼 때 어쩌면 팔공산이라는 하찮아 보이는 산에서
이 땅의 두 거장이 탄생한 셈이다.
섬진강의 흐름이 전라북도 진안, 임실, 순창 그리고 남원과
전라남도 곡성, 구례를 지나 하동과 광양을 거치는 남행이라면,
금산은 그 반대로 장수에서 출발해서 북으로 질주하여
무주, 금산, 영동과 옥천, 보은을 지나 대청호에서 잠시 쉼을 얻은 후
방향을 서쪽으로 급선회하여 연기와 공주를 적시고
부여 낙화암에서는 삼천궁녀들이 남긴 꽃잎을 담아 군산앞바다로 접어든다.
그 인생행로를 보면 어쩌면 섬진강보다 더 극적인 흐름이다.
같은 엄마 품에서 떠난 두 강은
결국 하나는 동북으로 흐르다 서쪽으로 휘감아 돌아 서해를 만들고,
하나는 남쪽으로 쉼 없이 달려 남해를 만들었다.
그 가냘픈 산허리에서 이 땅의 남단을 다 적시고,
남해와 서해까지 만들어 이 나라 이 국토를 더 없이 풍요롭게 만든 것이다.
어떻게 하여 이름 없는 작은 산에서 이처럼 위대한 강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섬진강을 밟으면서 자주 내 머리를 스치는 의문들이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섬진강은 광을 내거나 폼 잡지 않고 낮게 흐르는가 보다.
그 진액을 다 토해내어 위대한 강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여미어 온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자식들을 위해
등가죽까지 붙어버린 뱃살만 남았었고 그것도 쪼글쪼글 말라버렸었다.
자식이라는 위대한 강을 탄생시키기 위해 비록 당신들은 거산이 아니었을 지라도
남해바다와 서해바다를 적실만큼의 위대한 강을 만들어 내고자
그 배고픈 허리를 찬물 한 바가지로 참아내셨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섬진강을 따라 걷고 있으니 땀이 비 오듯 하고,
유등면사무소 앞 낮은들을 지나 대풍교를 건너니 여기는 남원 땅 금탄이다.
삿갓봉 아래에는 뒤잡들, 안시멀들, 장사래들과 같은 널따란 평야가 누웠고
강은 향가유원지를 휘감아 돌아 옥과천과 합류하여 더 풍만해 지는가 싶더니
두 개의 강이 만나는 지점이 곡성군 입면 합강리라 부른단다.
그러고 보니 한나절 사이에 순창과 남원, 곡성을 두루 섭렵하였다.
사람은 편을 나누지만 강은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법이 없다.
강은 여기가 어느 땅이냐고, 전라도냐고, 경상도냐고 묻는 법이 없다.
그러나 나는 가는 곳마다 여기가 어느 땅이냐고 묻는다.
강은 남쪽으로만 흐르라는 법이 없다.
금강처럼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으로 휘감아 돌기도 한다.
굳이 거산에서만 위대한 강이 탄생되리라는 법도 없다.
작은 산이지만 젖가슴을 다 짜내는 부모님의 심정만 있다면
무명의 산이라도 토지를 적시고 바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달맞이꽃도 굳이 달님만 맞이하라는 법도 없다.
때로는 달맞이꽃도 해맞이를 한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에 도착한 합강리 강 언덕에는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군무를 추듯
무리를 지은 달맞이꽃이 두 대문을 열어 젖히고 태양을 맞이한다.
달맞이꽃도 때로는 해맞이를 한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