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동계곡의 반란)
팔월의 조각구름, 미루나무에 걸리다!
(곡성군 입면 합강리, 청계동계곡)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로 떡 해 놓고 조약돌로 소반지어
언니누나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있네
지나가던 솔바람이 걸쳐놓고 도망갔대요.
팔월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동요들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아침 밥 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동무들과 개울가로 나가 하루 종일 멱을 감다
해 질 녘이 다돼서야 파란 입술에 하얀 이빨만 드러내 놓고
피라미 몇 마리를 병에 담은 채 집으로 돌아왔었다.
시냇가 모래는 뜨거워 발걸음 옮기기도 힘겨웠지만
고무신 기차놀이는 즐거웠었고,
멱 감다 차가워진 몸둥아리를 모래 속에 묻어 놓고
따뜻한 돌맹이를 베개 삼아 태양과 눈 마주치고 누웠을 땐
그 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요즘같이 40도 가까이 오르내리는 기온은 없었지만,
한여름 뙤약볕이 작열할 때에는 바람도 자고,
소먹이는 방천에 누워 하늘을 보면
오로지 미루나무 이파리만 가늘게 떨었었고
어김없이 작은 조각구름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신덕리에서 휘감아 돌아 생겨난 세월의 퇴적섬, 오른쪽이 동악산, 그 반대가 고리봉이다)
팔월의 태양은 도깨비다.
멱 감는 아이들의 몸둥아리를 순식간에 검게 태워버리고
엄마의 한나절 빨래를 한 바탕 바람에 말려버렸었다.
수억 마리의 매미를 합창단으로 끌어 모아 하루 종일 화음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구름과 바람을 미루나무에 매달아 놓아 이파리 하나도 미동시키지 않았다.
팔월의 섬진강 답사는 일종의 고행의 행군이다.
그러나 섬진강도 나와 마찬가지지 않을까?
태양이 뜨겁다고, 바람 한 점 없다고 그의 갈 길을 쉬지 않는다.
이제 그 팔월을 태양과 함께 섬진강을 걸어야 한다.
팔월이 아름다운 것은 그의 강열한 에너지,
가을을 만들어 내는 인내와 헌신 때문이 아닐까?
1년 중 가장 힘든 시기이지만,
내 인내를 시험하고 섬진강과 진짜로 하나 되어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내 한 방울의 땀도 섬진강에 보탬이 되어 그에게 힘이 된다면,
나 기꺼이 팔월의 태양아래 서리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펄떡이는 물고기와 같은 청계동계곡의 동심, 여름아 날 잡아봐라!)
곡성의 첫 동네, 입면 합강리를 출발한다.
긴 언덕배기, 사선으로 내리쬐는 태양을 가슴에 안고
그늘 한 점, 바람 한 방울 없는 언덕길을 걸어야 한다.
나는 신설중인 다리를 건너 강의 형태를 더 자세히 바라다 볼 수 있는
남원 대강면 둑방길을 선택했다.
강은 신덕리에서 크게 휘어지고 그 양쪽에는 각각 팔백에 가까운
곡성 동악산과 남원 고리봉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두 산은 자웅을 가리는 전사와 같았고
섬진강을 탐하여 서로 뺏기를 하는 투사와 같아 보였다.
동악산은 구름에 가려 산정상이 보였다 말았다 하고,
고리봉은 하얀 돌이 산의 절반을 덮고 있어
겨울이라면 마치 눈이 산을 덮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다.
강이 휘감아 도는 자리는 강폭이 넓어지고 그 한가운데는 세월이 쌓인 듯
퇴적토로 섬이 생겨났다.
그 섬은 여러 새들과 동물들의 서식지 일 뿐 아니라
상류에서 떠내려 온 온갖 잡동사니들과 오염물들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섬은 이들을 온전히 수용하고 정화시켜내는
섬진강의 허파와 같았다.
이처럼 섬진강은 세상 온갖 만물을 키워내는 엄마의 품일 뿐 아니라
주변의 더러워진 오물들을 정화시켜내는 아버지의 엄격함을 지녔다.
동악산과 고리봉의 접점에 이르니 두 산이 거의 하나로 맞닿아 있는 느낌이고
섬진강에는 짙게 산 그림자가 내려 앉아 흠뻑 젖은 땀을 식혀주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계곡을 울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온다.
청계동계곡에서 발한 소리다.
순간 지금까지 고요했던 섬진강이 잠에서 깨어난 듯
계곡은 온통 아이들의 웃음소리, 물장구치는 소리, 아빠를 부르는 소리로 가득하다.
물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동심의 세계로 안내하는 솜씨를 가졌다.
청계동계곡은 동악산의 심장이요 섬진강의 의좋은 친구다.
섬진강은 그 시원(始原)의 고요에서 출발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섬진강댐에서 생사를 건 사투,
회문산 아래 장군목에서의 거친 몸부림을 경험하였고
협곡과 너른 들판 지나기를 반복하다 이곳에 도달했다.
오랜만에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울려나는 청계동계곡에서 섬진강은 동심이 된다.
(동요가 살아 있는 곳,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의 본고장 하동송림백사장)
섬진강이 진짜 동심이 되는 곳은 더 남쪽으로 내려와야 한다.
강물이 조류에 밀려와 조석으로 물의 높낮이가 바뀌는 곳,
경전선 철교가 있어 기적소리가 더 요란스러운 하동 송림백사장이다.
재첩의 하품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질수록 더 즐거울 수 있는 곳,
오백리를 달려와 나른해진 섬진강도 백사장에서 몸을 누일 수 있으며
영원한 나의 팔월의 애가인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 태어난 곳,
천 번 와도 처음 오는 듯하고, 처음 와도 천 번 와 본 듯한 철교아래 백사장,
어찌 섬진강물도 이곳에서 쉬어가지 않을 수 있으리.....
청계동계곡에서 등달아 동심이 된 나는
다시 동악산과 고리봉의 환송을 받으며 기찻길의 고장인 곡성을 향하고
청계동 계곡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강물을 따라 나와 함께 걷는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