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 철교아래로 섬진강은 흐르고)
이제 평안하라! 쉼을 얻으라!
(청계동계곡~금곡교)
내게 있어서 섬진강은 자유다
상상이다
스승이다
어머니다
친구이며 애인이다.
섬진강으로 나와 발걸음을 뗄 때 나는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느낀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내게 다가올 일들도 모두 백지가 된다.
그럼으로 나는 온전히 그에게 집중할 수 있다.
강 위에 뜬 구름,
그 가장자리에 서 있는 미루나무,
바위위에 걸터앉은 청동오리,
그를 가로질러 서 있는 낮고 작은 다리...
그들 속에서 나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는 학교와 책에서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중의 스승이다.
이것을 배우라, 저것을 암기하라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스승이요 그가 있는 곳이 교실이다.
그는 세상만물을 모두 포용하는 끝없이 넓은 가슴을 가졌다.
그의 잘록하고 가는 허리는 물동이 이고가시는 어머니의 허리를 닮았다.
나를 봐도봐도 또 보고 싶어 하시고
내가 옆에 있어도 나를 늘 갈급해 하시는 영락없는 어머니다.
그는 나의 지위나 내가 가지고 덜 가짐을 통해 나를 판단치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친구중의 친구다.
(섬진강을 품은 동악산)
태풍이 가져다 준 기운으로 시원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청계동계곡은
불과 보름사이에 요란하고 화려한 계곡에서 정적에 감싸인 정숙의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강 건너 남원 땅 고리봉 아래 새적골에서는
마치 소죽솥에서 피어나는 수증기처럼 아침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밤새 차가운 기운으로 낮게 내려앉았다가
날이 밝자 고리봉을 향하여 승천하는가 보다.
그 아래 여울에서는 청둥오리를 비롯한 온갖 물새들이 아침산책을 나와
물장구를 치며 청계동의 아침을 깨운다.
청계교에서 바라본 섬진강은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처럼
다리 위의 강과 아래의 강은 완전히 다른 강이다.
이쯤에서부터는 섬진강도 상류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나 중류로 바뀐다.
그만큼 더 여유롭고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풍만해진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같은 강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다리위에서 강의 북쪽과 남쪽을 번갈아 오가며 그 형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다리위의 강, 그 삼 백리 물길을 반추해 본다.
(금곡교 여유)
섬진강의 태생지 진안,
그를 키워냈던 임실,
성장기의 질풍노도와 같은 험난한 세월을 보듬어 냈던 순창,
그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이 섬진강 그의 몸에 새겨져 있다.
진안의 좁디좁은 계곡에서는 협착한 물길을 급하게 휘감아 돌았었고
임실에서는 넓어졌다 좁아지고 낮아졌다 높아져
결국에는 수십미터 낭떨어지로 떨어져 버리는 험난했던 고비를 넘겼었다.
순창에서는 회문산과 원통산의 협곡 속에서 한바탕 전투라도 치러내서인지
그 모습 속에는 처절함이 배여 있었다.
장군목의 온갖 기괴한 바위틈바구니에서 나는 전장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 잔물결에는 민중과 함께 싸웠던 전봉준장군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강과 길의 갈림길에서는 항일구국운동을 펼쳤던 선각자들의 뒷모습이 보였었고
저문 날 모퉁이 길에서는 바람처럼 흩날리는 빨치산 무리들의 최후를 보았다.
섬진강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그 설움을 다 보듬고 품어버린 어머니의 가슴이다.
민초들의 엉어리진 가슴들을 풀어헤치고 녹여내는 용광로다.
강물위에 일렁이는 잔물결은 죽도록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문신이다.
네 위에 드리워진 산 그림자는 너의 가슴에 새겨진 엉어리다.
숱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죽여 지켜봤으니
그 가슴인들 다 닳아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 가슴인들 다 녹아지지 않고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으랴?
그래서 섬진강은 가슴이 다 녹아내린 어머니다.
다 줘 버리고 말라버린 빈 젖가슴이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닳아지고 녹아져 어머니의 빈 젖가슴이 되어버린 상류의 강을 뒤로하고
이제 나는 요천과 만나는 기차마을의 곡성읍을 향한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분위기에 그동안 긴장했던 근육이 풀어지고
맥이 떨어지는 듯 했다.
철썩이는 물소리조차 여유롭고 새들의 노님도 한가롭다.
구름사이로 빛나는 태양, 그 빛깔도 온화하고
느리고 완만한 강의 흐름에 졸음이라도 올 듯 하다.
그 잔잔한 물결에서 곡성사람들의 후덕하고 비단결 같은 인정(人情)을 느낀다.
섬진강!
이제부터 평안하라!
이제부터 쉼을 얻으라!
그 말라버린 가슴을 채워 풍만한 젖가슴이 되라!
엉어리진 상처를 싸매라!
저 멀리 호남선 철교위로 새마을호 기차가 달리고
그 아래 금곡교와 요천이 나를 속히 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