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선마을에 해가 떨어지면 .....
(호곡마을 ~ 탑선마을)
섬진강이 섬진강인 것은 그 줄기를 따라 육 백리
그 잘록한 허리들 마다 사람들의 삶이 익어가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섬진강이 그 첫 걸음을 시작했던 원신안마을과 유동마을이 그랬었고
나루터가 역사책처럼 살아 있는 호곡마을과 두계마을이 그랬었다.
강 허리에 마을이 없었다면 섬진강은 그 홀로 강이 될 수 없었을 게다.
호곡나루에서 두계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섬진강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그 장중함, 그 위에 낙조가 여름철 홑이불처럼 내려앉았다.
그 길로 한 오리쯤 내려오면 두계마을이다.
두계마을은 외할머니마을로 유명하다.
요즘 아이들에게 외할머니는 과연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예전의 외할머니가 아닌 또 다른 외할머니가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을게다.
두계마을은 아이들이 외갓집을 체험할 수 있는 마을로 소문이 나 있다.
두 팔 벌려 맨발로 외손자를 맞으러 나오시는 할머니 ...
군고구마, 옥수수, 홍시와 곶감....이런 것들은 어쩌면 외할머니의 전유물이었다.
할머니보다 외할머니가 더 정감이 있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
외가가 바로 곁에 있었지만 늘 외할머니는 내게 고향의 품 같았었다.
키 작은 외할머니의 속바지 안에 숨어 있던 빨간 주머니에는
언제나 동전이 짤랑거리고 있었고
고방에는 사시사철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가 숨겨져 있었다.
외할머니는 무엇이든지 만들어 내는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분이었다.
증기기관차의 종점이 있는 가정역 건너편에는 가정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간이 천문대가 있어 섬진강이 밤하늘 별들과 속삭이는 마을이다.
탑선마을은 이곳 가정마을에서 십리정도 계곡을 향해서 올라가야 한다.
설마 이곳에 마을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짐작도 못했었다.
마을표지석이 가정마을 입구에 없었더라면 또 하나의 보물을 그냥 지났을 것이다.
탑선마을은 많아야 이십 여 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동네사이로 작은 실개천이 흐른다.
며칠 전 비가 온 덕분에 개울물은 넘치듯 흘렀고,
때문에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온 동네를 감싸고 있었다.
이 작은 개울이 동네를 둘로 나눠놓고 있을 줄이야...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구례군 구례읍 탑선마을과
곡성군 오곡면 가정마을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개울은 작은 시멘트다리로 이어져 있다.
행정구역상 나눠져 있을 뿐 실상은 한동네다.
홀로사시는 할아버지 집에 한참을 머물면서 살아가는 얘기를 들었다.
꼭 전설처럼 얘기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치료차 서울에 가 계신단다.
방에는 작은 텔레비전만 어둠을 밝히고 있다.
돼지와 함께 동거했다는 재래식 화장실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높게 걸려 있다.
할아버지는 곡성군민이다.
면사무소 일보러 가는 것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게 그다지 문제되지는 않아 보인다.
사람이 나눠 놓았을 뿐 그것이 결코 사람의 정을 나눌 수 없기에,
곡성사람이나 구례사람이나 매양 탑선마을 사람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탑선이 탑선마을 된 것은 마을에 특별한 보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물 509호인 이 논곡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때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상륜부는 없어진 상태였다.
저~어기 저기 올라가봐, 탑이 있어...
탑이 있어서 탑선마을이여...
탑탑자, 신선선자야...
할아버지는 탑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듯 했다.
삼층석탑은 마을과 불과 이백여 보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저 멀리 섬진강이 잘록한 허리를 가다듬고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 곳이다.
산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고 벌써 조생종 밤이 떨어져 오름길에 굴러다닌다.
태양과 마주하고 있는 석탑의 앞면이 붉게 물들더니
태양이 탑선마을에 완전히 떨어지자 기도가 시작되었다.
누군가 홀로 드리는 절제된 기도,
손이 하늘로 펴졌다 가슴으로 내려왔다 하는 동작이 예사롭지 않다.
하루 이틀, 일 년 이년 드린 기도의 모습이 아니다.
신출내기 내가 봐도 기도가 몸에 배여 있어 보였다.
누군들 이 탑을 보면 기도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사람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나약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 속에 신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일까?
이런 거룩함 앞에는 무릎을 꿇고 싶어지니 말이다.
제가 기도를 방해 했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사진 찍으세요.
매일 이렇게 기도하세요?
예. 한 오십년 쯤 됩니다.
목포에서 이곳으로 왔는데 매일 그렇게 기도하고 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다소 놀란 듯 중년의 아저씨
그의 정갈하게 차려입은 옷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십년을 기도했다니 그 기도가 보통기도 이겠는가?
그분의 기도가 다 이루어지길 빌어주면서 석탑을 뒤로하고 마을을 바라보니
어둠이 내려앉고 홀로사시는 할아버지 안방에는 텔레비전이
점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다.
탑선마을에 태양이 내려앉으면
섬진강은 여름철 홑이불을 덮어 놓은 것처럼 분홍색 치마로 물이 든다.
탑선마을에 태양이 떨어지면 기도가 시작된다.
그분의 기도로 오늘의 탑선마을이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눈물 흘리며 드리는 기도로 오늘의 내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빚을 지지 않으려면....
섬진강에 태양이 내려앉을 때에는 탑선마을에서는 기도가 시작된다.
기도하는 마을, 기도하는 사람이 이 땅에 가득하다면
세상은 구례군 구례읍 탑선마을과 곡성군 오곡면 가정마을처럼
둘이 하나 되고 마을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 평화가 넘쳐나지 않을까?
섬진강에 태양이 내려앉으면 이제는 기도를 해야 할 일이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