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鴨錄) 대회전(大會戰)
(압록마을 ~ 구례구역)
이제 곡성과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다.
곡성은 섬진강의 중류로서 강의 허리와 같다.
위로는 진안과 임실을 머리로, 순창과 남원 가슴으로,
아래로는 하동, 광양을 양 다리로 삼아 서 있는 형국이다.
강은 그가 흐르는 지역의 특성을 철저히 반영하는 듯하다.
진안과 임실은 섬진강에 그의 남성적 성격을 담았다면
곡성은 여성적인 면이 다분히 있어 보인다.
진안의 지리적 형세는 다소 거칠고 남성적이며 때 묻지 않고
꾸밈이 없는 원시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의 형세가 섬진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진안과 그가 품고 있는 섬진강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임실과 순창은 진안에 비하면 많이 유순한 듯하나
그 산세의 우람함은 진안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때문에 회문산과 원통산을 사이에 두고 장군목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순창을 지나면 곡성이다.
곡성은 여성적인 지세를 지녔다.
그 산하가 유순하고 그를 닮은 것이 또한 섬진강이다.
동악산과 고리봉을 지나면 곡성의 진면목이 반영된 섬진강의 부드러움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강이 이러할진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강은 그 지역의 산세를 닮았고 사람은 강을 닮았다.
그러니 山, 江, 人은 서로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곡성은 나에게 부드러움의 유익을 가르쳐 주었고
그 어떤 향기보다 사람향기를 넘지 못함을 일깨워 주었다.
이제 나는 그의 환송을 받으며 곡성과 구례의 경계인 예성교위에 서 있다.
곡성이여 잘 있으라!
너의 향기, 너의 너그러움, 너의 체취를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리!
그 따스한 품으로 섬진강을 키워냈었고,
그 속에 사람냄새 나는 호곡나루를 만들었으며
심청이도 그 나루를 건넜으리라!
추억이 화석처럼 쌓여 굳어진 너의 살짐 하나를 떼 내어
내 가슴에 붙이고 떠나니,
어디 간들 너를 생각하면 추억이고 고향이지 않겠는가?
압록마을은 곡성의 마지막 점이자 구례의 시작점이다.
압록은 원래 합록(合綠)이었다. 두 강의 푸른 물이 합류한다는 의미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오리과의 철새들이 날아들게 되자
오늘날의 이름인 압록(鴨綠)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강물이 불어서인지 이날 오리들은 볼 수 없었다.
오로지 오리를 닮은 소년들이 보트 두 개에 나눠 타고 래프팅을 하고 있었다.
강물이 불어 위험천만한 장면이 연출될 수 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치 오리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듯 온 계곡이 아이들 소리로 가득찼다.
예성교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니 강물이 역류를 하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보성강과 섬진강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때마침 세 번 연거푸 휩쓸고 간 태풍으로 강물은 성난 파도가 치고 있었다.
보성댐을 급방류하니 황토색 흙탕물이 보성강에서 치고 내려와 섬진강을 가로막고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물을 역류시키는 현상이 발생됐다.
요천이 숫강 이듯이 이 상황에서 보성강도 요천 못지않은 숫강행세를 했다.
곡성의 유순함과 부드러움에 젖어 있던 섬진강은
보성강의 역동성에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강은 보성강 천지로 바뀌는 듯 했다.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회오리 바람이 몰아쳤다.
숫강인 보성강이 칼날로 찌르듯 덤벼드니 섬진강인들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였다.
섬진강과 보성강의 대회전이 시작된 것이다.
江 대 江, 强 대 强의 대회전이다.
말이 대회전이지 보성강의 일방적인 승리를 보는 듯하다.
보성강의 갑작스런 위세에 섬진강은 한켠으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보성강의 위용에 잠시 후퇴를 하는 듯 강물이 역류를 했다.
그 둘이 합쳐지는 예성교 아래서는
두 강의 파도가 엉겨 붙어 잠시 격랑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숨 돌리기를 마친 섬진강은
그의 넉넉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보성강을 접수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보성강은 섬진강에 흡수되듯 하나가 되어 구례로 향했다.
섬진강이 이처럼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장면이다.
산세가 험했던 진안과 임실에서 조차 이런 모습은 없었다.
장군목의 그 무시무시한 계곡을 통과할 때에도 이처럼 처절한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이는 어쩌면 보성강의 일방적인 몸부림이었다.
섬진강은 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 넓은 품으로 품어 버린 것이다.
한동안 격랑과 같은 흐름이 채 오리도 못가서 잔잔한 호수처럼 변해버렸다.
기세등등한 보성강이 부드러움의 섬진강 품에 안기어 그 자신을 포기하고
섬진강으로 화하여 버린 것이다.
포용의 승리, 아량의 승리, 넓은 가슴의 승리가 아닐까?
자칫 江대 江, 强대 强으로 치닫을 수 있는 형국에서
섬진강의 그 특유의 포용력으로 강함이 부드러움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강함만으로는 이길 수 없나 보다.
사백리 이상을 흘러내려 오면서 섬진강은 온갖 위험을 겪으면서도
그의 특유의 포용력을 발휘하여 그 모든 것을 품어 버린 것이다.
이윽고 유곡마을에 이르니 강을 지키고 서 있는 부부송이
강대 강의 아름다운 포옹을 축하하고 이들의 장도를 배웅하는 듯 서 있고,
독자마을 입구 섬진강교회 앞마당 대봉감은 벌써 붉은 홍시가 되어
섬진강에도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