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능해(他人能解), 만인소유(萬人所有)
(노고단~토지면))
주름치마를 펼쳐놓은 것 같은 편안하고 온화한 지세 덕분에
노고단 아래 산자락에는 마을이 즐비하다.
워낙 완만하고 기름져 치마의 주름진 골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들을 보면
편안하다 못해 졸음이 올 지경이다.
북으로부터 산동면, 광의면, 마산면 그리고 토지면으로 이어지는 동네들은
이 나라의 복 받은 땅들 중에서도 으뜸이다.
토지면은 아침 해 뜰 무렵부터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까지
온종일 태양아래 몸을 누일 수 있는 이 땅에 몇 안 되는 마을이다.
그 중에서도 토지면 오미마을은 명당중의 명당임이 확실하다.
누구의 해석을 들은 바도 아니지만 보통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마을이 얼마나 복 받은 땅인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노고단을 뒤로하고 완만한 경사면에 마을이 자리 잡고
그 앞에는 계단식 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2차선 국도 건너 아래에는 원내마을과 용정마을이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안촌마을과 신기마을이 받쳐주고 있다.
그렇지만 오미마을이 오미마을 되게 한 것은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다.
추운 겨울날 화롯불 같은 온기를 뿜어내는 운조루가 있기 때문이다.
운조루는 내가 살고 있는 곳과의 거리가 50리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금껏 여러 번 찾아가 본 곳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오래된 집, 한옥, 부잣집 정도로만 기억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집 앞을 지날 때 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사람에게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온기보다 더 따뜻한 것이 있을까?
운조루는 바로 그런 곳이다.
이 저택은 영조52년, 1776년에 당시 삼부수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그 시대의 대표적인 양반주택이다.
양반주택이라고 해도 그에게서는 위압감을 느낄 수 없다.
양반가의 풍채와 기풍을 지녔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허세를 부리지 않고
노고단과 들판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섬진강에 자기를 맞췄을 뿐이다.
하지만 운조루가 운조루 된 것은 외형이 아닌
특별한 정신이 그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타인능해>의 정신이다.
그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 키 크기의 쌀뒤주다.
타인능해는 쌀뒤주의 이름과도 같이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 누구나 열고 필요한 만큼의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뒤주는 타인의 자존심까지 배려한 모습이 역력하다.
가만 살펴보면 뒤주의 위치가 행랑채와 사랑채의 길목 외진 곳간이다.
타인들이 주인과 쉽게 마주치지 못하는 곳에 놓아
쌀을 가져가는 이웃의 자존심까지 지켜주기 위한 배려의 정신이 숨어 있다.
그 뿐 아니다.
혹시나 밥 짓는 연기로 인하여 때를 챙겨먹지 못하는 이웃이
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굴뚝을 높이 세우지 아니하고
난장이처럼 허리보다 더 낮에 만들어 놓았다.
이웃에게 설움을 먹이느니 차라리 내가 연기를 마셔버리겠다는 것이다.
행랑채에서 사랑채로 올라가는 길목도 계단으로 만들지 않고
노인이나 장애인까지 보행에 불편이 없도록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어 놓았다.
유이주, 그는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이후부터 운조루는 옛날의 내가 생각한 운조루가 아니었다.
차가운 가슴을 데우는 온기가 가득한 아궁이가 되었고
거칠고 냉정한 마른 손을 따스하게 하는 화롯불이 되었다.
명가를 이루는 것은 외형이나 그의 지위가 아니라
그 속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과 기풍이리라!
그 것이 단일세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손과 자손으로 그 정신이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나 보다는 타인의 입장을 더 배려하는 삶의 방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운조루를 나오니 해가 서산에 걸렸다.
섬진강은 태양의 강이다.
태양이 뜨는 강이요 태양이 지는 강이다.
아침을 깨우는 강이요 잠을 재우는 강이다.
강가에 서니 운조루가 눈에 아른거렸다.
유이주의 모습이 섬진강에 투영되었다.
섬진강과 유이주가 오브랩되는 듯 했다.
명가와 섬진강의 만남,
어쩌면 섬진강이 키워낸 명가이리라!
그의 끊임없는 행진,
마르지 않는 인내,
나보다 세상을 위한 헌신,
결국 선은 악을 이긴다는 진리에 대한 믿음,
남을 탓하지 않고 나를 경계하겠다는 안으로의 채찍 ......
이런 섬진강의 본성이 명가를 키워내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운조루의 他人能解는 섬진강이 자신을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소유를 허락한
萬人所有 정신의 산물이 아닐까?
그렇다. 섬진강은 만인의 소유다.
배고픈 자도, 배부른 자도,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남자도, 여자도,
오늘을 사는 이도, 내일을 살아갈 이도...
섬진강만큼만 인내 하여라!
섬진강만큼만 정직 하여라!
섬진강만큼만 공평 하여라
섬진강만큼만 가슴을 열어라
섬진강만큼만 자유하여라!
섬진강만큼만 고요하여라!
섬진강만큼만 따뜻하여라!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