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라! 위로하라!
(산청군 사리 ~ 운리마을)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주는 것이다.
넘는 것이 아니라 보듬고 안기는 것이다.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행 하는 것이다.
그를 통하여 치유 받고 위로받는 것이다.
산을 향해 걷다 보면 이는 명확한 사실로 다가온다.
산 정상에 한발을 디뎠다고 정복한 것이 아님을,
잠시 영광된 자리에 섰다고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리.
그럼으로 산으로 향할 때에는 나를 내려놓고 산과 손잡을 일이다.
남명선생의 숨결이 살아 있는 덕산에 서면 천왕봉이 손으로 잡힐 듯하다.
산봉우리의 하얀 눈은 마치 산이 중절모를 쓰고 있는 듯하고
천왕봉이 그 모자를 벗으면 비로소 봄이 되리라!
그 중절모가 녹아져 거림계곡으로, 대포리와 유평리로 흘러내려 덕천강을 이루고
덕산에서 이들이 모여 거대한 강이 되니 덕천강이다.
이 덕천강은 하동 옥종면과 진주 수곡면을 적시고 진양호에 접어들어
남강이 되고 이윽고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하늘에서 내린 한 방울의 눈이 천왕봉에서 받아
낙동강과 남해바다와 태평양을 만든다.
덕산에 은거하셨던 남명선생은 이 모습을 관조하시지 않았을까?
대 자연의 진리에 스스로 몸을 낮추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남명이 있게 된 것 아닐까?
사리부터 운리로 향하는 길은 협곡이다.
좌우로 마근담봉과 석대산이 자웅을 겨룬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입은 옷이 큰 짐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산을 나선 사람들의 옷차림은 울긋불긋하다.
모처럼 산이 생동감으로 가득 찬다.
나의 지리산 답사에는 아름다운 이웃이 함께하여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평사리로 이사 온 후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이웃사촌이 된 분들이 있다.
나보다 서너 살 위인 정형과 그의 아내 미지 씨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미지 씨는 대만 출신으로 중국인 특유의 낙천성과 쾌활함을 지녀
산행 내내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미지 씨는 산행을 즐길 줄 알고 관조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계곡에서 듬직한 나무를 만나면 그 나무에 기대거나 안겨
귀를 대고 나무가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대나무 숲에서는 정좌를 한 채 긴 호흡으로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녀의 유머는 백만 불짜리다.
다소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늘 기쁨을 선사하고
때때로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뽑아대면 계곡은 금방 공연장이 된다.
이분들이 있어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 기대가 된다.
지리산은 우람하지만 칼날 같은 산이 아니라 봉우리가 둥글고 정감이 있다.
그래서 산봉우리에 앉으면 계곡아래 웅덩이로 풍덩 빠져들 것 같다.
그러나 협곡 가운데 서면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를 세워놓은 듯
여러 개의 산이 겹쳐져 원근법이 적용된 그래픽을 보는 듯하다.
그런 후 그들의 음성이 들린다.
“네가 있기에 위로가 된다”
앞에 있고 뒤에 있어 겹쳐진 산들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홀로 서 있지 않기에 천년이고 만년이고 그대로 서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원근법에 따라 점점이 작아지고 옅어지는 산,
저 산은 또 다른 산에 기대어 서 있을 것이고
그 산은 또 다른 산을 기대고 서 있을 것이다.
홀로 선 산은 없다.
누군가 내 뒤에 있어서 내가 기댈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첩첩이 겹쳐져 있는 산,
그 연하여진 연속선에서 네가 있음에, 그리고 내가 있음을.
위로가 된다.
내가 기댈 곳은 그렇게 강할 필요도 없다.
나보다 힘이 셀 필요도 없다.
단지 내 뒤에, 내 옆에 있어만 주어도 되는 것이다.
언젠가 지치고 피곤하여 더 이상 지탱해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내 옆에 잠자는 아이들이 내게 힘이 되었었다.
세상모르고 자라는 코흘리개 아이들이 내가 기댈 언덕이 된 것이다.
“그래 너희들이 나의 힘이야, 나의 위로야!”
그냥 있어만 주어도 내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
뒤에 서 있어만 주어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산,
마치 도미노 놀이기구처럼 첩첩히 겹쳐져 있는 산,
서로가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주는 모습이다.
이처럼 지리산은 위로가 되는 산, 내게 힘이 되는 산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있음으로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성공한 삶이 아닐까?
서산으로 해가 지고 산봉우리에는 아직 이파리가 나지 않아
머스마들의 빡빡머리처럼 빳빳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난다.
오늘 밤 차가운 천왕봉 바람 속에도 머스마들은 서로를 위로하면서
아침을 기다릴 것이다.
위로하라! 위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