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꽃잎이 떨어져야만 가을이 온다
(함양군 의중마을 ~ 벽송사)
숲은 잉태의 공간이다.
창조의 궁창이며 상상력의 자궁이며 탯줄이다.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 소리, 바람소리, 소나무를 스쳐지나가는 구름, 나의 사유함까지,
이 모든 것은 숲의 창조적 산물이다.
태초의 인간이 살았던 곳도 분명 숲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탄생도 숲에서 일어났음이 분명하리라.
일상에 헤매면서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고 생각이 새하얗게 되었을 때
숲은 고갈된 에너지를 채워주었고
여름 날 남쪽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와 한줄기 폭우를 쏟아 놓듯이
갈한 상상력의 주머니를 순식간에 채워주는 것도 숲이다.
그럼으로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기는 것이며
보듬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잉태의 공간, 상상력의 자궁과 궁창을 경험하러
새벽 세시 반 알람에 맞춰 일어났다.
칠선계곡이 시작되는 의중마을은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조선팔도 피서인파는 모두 여기에 모인 것 같은 느낌이다.
이들도 숲과 산을 사모하는 이들이라...
이슬이 숲을 잠재웠다.
무겁게 내린 이슬로 바짓가랑이와 신발은 순식간에 물에 젖어버렸다.
산 언덕배기에 놓인 의중마을에서는 고향냄새가 물씬 났다.
5백년이 넘은 당산나무를 지나 외길에서 작은 갈림길을 만나니
오늘 나의 목적지인 서암정사와 벽송사 이정표가 기다리고 서 있다.
그 작고 소담한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팔월의 첫 주 답게 하늘은 푸를 대로 푸르고
잎이 무성한 옥수수가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오늘의 답사는 사찰에 대한 기대보다는
사찰로 가는 그 정적이며 사유의 길을 경험하고 싶은 것 때문이다.
이 길은 옛날 수도자들이 걸었던 길,
그 고뇌, 나와 세상에 대한 탐구, 그 진리를 향한 열정,
나를 두고 너를 만나러 떠나는 길.... 그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들도 나처럼 쓰러지고, 절망하고, 곁길로 빠지고,
조상과 형제와 이웃을 원망했겠지.
그러다가 피를 토하듯 후회하고 돌아서서 부처님께 무릎 꿇었겠지...”
“그래, 사람이란 그런 거야 원래부터,
그렇게 하면서 크고 사람이 되는 거지...”
스스로를 다독이고 안위하면서 벽송사길로 발걸음은 옮겨졌다.
실타래에서 풀려서 나온 실처럼 벽송사로 가는 길은 작은 외길이다.
그 끝 부분을 잡아서 실타래에 감으면 졸졸 따라 올라올 것만 같았다.
나는 마치 한 사람의 구도자가 된 듯 착각에 빠졌다.
먹구름 속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구름을 뚫고 내려와 땅에 꽂히듯
숲에서 붉은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꼈다.
현숙한 여인처럼 온 숲을 감싸고 품는 듯 풍만한 모습의 백일홍나무다.
“그렇지 백일홍은 여름의 전령사지,
백일홍 꽃잎이 떨어져야만 가을이 시작되지,
그의 꽃말은 떠나간 님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라고 했지...”
실처럼 가는 외길에 백일홍 꽃잎이 떨어져 수를 놓았다.
“아, 가을이 시작되는가 보다....”
수 백 년 쯤 되어 보이는 백일홍나무는 아직도 청춘이다.
나무에 비하면 사람의 연륜은 너무나 짧은 순간이다.
수 백 살이 되었음에도 이들은 아직도 끓는 팔월처럼 청춘을 자랑한다.
“나의 꽃잎을 지르밟고, 나의 품에 안기소서...”
백일홍 꽃잎은 온 몸을 던져 나의 답사 길에 뿌려진다.
산죽터널은 외길이 준 또 하나의 감동선물이다.
얼마나 빼곡히 자라났는지 마치 터널과 같이 어두웠고
그 끝 부분에는 밝은 빛이 내려앉았다.
화려한 백일홍 관문에 이은 또 하나의 축복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자칫 지루하고 상념에 빠질 외길 행로에 이처럼 감동스런 선물이 내게 부어졌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온갖 에너지를 다 쏟아 노래하는 숲속의 악대들이었다.
풀벌레들, 매미들, 화려하고 희귀한 목소리를 가진 새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세상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아, 이들은 목청을 다해 나를 응원해 주었다.
사찰에 대한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지만
차라리 보지 않음만 못하였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상상의 서암정사로 남겨 놓을 것을”
고목의 소나무 두 그루가 인상적인 배경이 되고 있는 벽송사는
그 단아한 모습이 소나무와 어울려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렇다. 내가 위안을 받을 곳은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그랬었다.
큰 누님과 같은 백일홍, 외길에 난 어두운 산죽터널,
나의 사유의 길에 배웅을 해 준 세계 최대의 합창단과
악대를 동원하여 연주해 준 숲속의 악대들,
그들에게 애초부터 나의 위로가 있었던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나에게 혼을 불어 넣어준 벽송사길 삼총사들과의 만남은
나 또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야 한다는,
외길 숲길에서 기대하지 않은 한 줄기 빛이며 소나기여야 한다는
내 속의 작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백일홍 꽃잎이 떨어져야만 가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