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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환의 지리산별곡 제12호 큰 산 얼굴 널 닮고 싶다
TheFestival 기자    2017-09-18 20:37 죄회수  4692 추천수 3 덧글수 1 English Translation Simplified Chinese Translation Japanese Translation French Translation Russian Translation 인쇄  저장  주소복사

큰 산 얼굴, 널 닮고 싶다

(함양군 금계마을 ~ 남원시 매동마을)



비라도 흠뻑 맞으며 걷고 싶었다.

비는 사람을 초연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능력도 보유하고 있으며

억누를 수 없는 그 어떤 화도 비를 맞으면 한순간에 식혀지리라.

지리산에서 홀연히 내리는 비를 맞는 것은 축복 아닐까?

하물며 이렇게 엄습하는 더위에서는 더더욱 그를 것이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초강력 더위가 지구촌을 포위하고 있다.

예전엔 아무리 더워도 길가의 코스모스와 호박잎이 시드는 것 정도로 그쳤었다.

그 어떤 더위도 정자나무 그늘 아래에서 장기 몇 판만으로도 이겨낼 수 있었다.

샛강에서 고무신으로 피라미 몇 마리 잡고나면 더위는 서산으로 넘어가 버렸었다.

요즘에는 35도 넘기는 것은 예사다.

“이깟 더위쯤이야”하면서 대수롭게 넘겨버릴 수 있지만

이것이 올해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그냥 넘길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비를 생각하고 금계마을을 출발했다.


출발부터 경사가 예사롭지 않았다.

창원마을을 지나 등구재를 너머 매동마을까지가 오늘의 일정이다.

숨을 헐떡이고 삼십분 가량 오른 후에야 창원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도달 할 수 있었다.

창원마을은 요새와도 같은 곳이다.

뒤로는 법화산이, 앞으로는 백운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경사진 곳에 계단식 논배미들이 예술 같다.

창원마을 고개 너머 낙락장송 소나무 군락지가 터널을 만들어주었다.

구름이 짙게 덥힌 날이라 걷기로는 오늘 같은 날이 제격이다.

곧 빗방울이 내릴 듯하지만 내리는 것은 땀방울뿐이다.

그러나 나의 염원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비록 초연히 걸을 수 있을 만큼의 비는 아니지만

숲속의 잎사귀들을 적실만큼의 비가 내렸다.

숲에서 듣는 빗방울 소리는 또 다른 감흥을 자아낸다.

오로지 숲과 나만의 대화로 들리기 때문이다.

잠시 비를 내리게 만들었던 구름이 천왕봉을 벗겨 하늘로 떠오르니

지리산 정상이 더 가까이 잡힐 듯 적나라한 산자락의 모습이 드러난다.

산은 왜 저리 주름질까?

같은 산이지만 같은 주름은 없다.

골마다 제각기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있겠지.

허기야 수 만년 동안 내 같이 허약한 체질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달려와

온갖 기도라는 기도는 다 하고 갔을 터이니 그 가슴이 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얼굴의 주름인들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지리산은 그 싸맨 가슴을 좀처럼 드러내 놓지 않는다.

등구재 뒤에 서 있는 법화산, 저 멀리 노고단의 줄기 만복대를 바라보면

그들의 아픈 가슴일랑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비록 높이로는 견줄 수 없지만

법화산과 만복대를 거느리고 있는 곳이 등구재이다.

해가지는 만복대의 노을이, 달이 뜨는 법화산의 달빛이 친구가 되어주기 때문이리라.

동과서의 만남, 만복대와 법화산의 조우,

전라도 인월과 경상도 마천, 너와 나와의 만남이 있었던 곳이 등구재이다.

한국의 재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문화적 퇴적물들이 쌓여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화석으로 굳어져 있다.

문명의 교차로이며 정보의 광케이블이었다.

씻을 수 없는 恨과 삶의 애환들이 쌓여서 생긴 것이 재이리라.


거북이 등처럼 넓은 등을 가진 등구재는 그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또 퇴적되어 있을까?

그 퇴적물 위에 오늘의 문명의 꽃은 피어났으리라.

그 화석을 더듬어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고 그 위에 내일의 지도가 그려지리라.

재가 없었던들, 오늘 날의 한국적 정서와 고향인들 남아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지리산 주능선이다.

전라도 등구재에서 남원을 향하여 가면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중봉에서 출발한 주능선은 천왕봉, 제석봉, 삼신봉을 지나

영신봉, 칠선봉으로 그 흐름이 연하고 재를 넘어가듯 점차 낮아진다.

그래서 인지 모른다.

창원마을에서 등구재를 너머 매동으로 가는 코스는 지리산 주능선의 흐름을 빼박아 보였다.

태곳적부터 마주보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큰 산 얼굴을 가진 지리산 주능선을 등구재 고갯길은 닮아 있었다.

병풍 같은 주능선이 동서로 가로질러 서 있어서

지리산 남쪽의 하동과 구례를 품고 그곳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 주었으리라.

저 멀리 바래봉 아래 인월이 보인다.

한마디로 지리산 동네다.

매양 바라보는 지리산, 그속의 사람들 또한 지리산을 닮았겠지?

오래 바라보면 닮겠지?

나 또한 지리산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지리산을 닮아 있겠지?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는 나의 모습을 닮아가겠지?

그래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닮아가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야 하리라.

만복대가 법화산을 닮은 것같이....

노고단이 천왕봉을 닮음 같이....

나 또한 너를 닮고 너 또한 나를 닮아 갈 것이다.

큰 산 얼굴 천왕봉, 촌스런 너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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