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가지 예찬
(남원시 주천 ~ 구례군 산동)
한동안 지리산엘 가지 못했다.
가을이 저만치 떠나가는데, 안달이 났다.
임 그리워 몸이 달아 오른 사람이 아마 이 같을 것이다.
평사리 산자락에는 이미 가을이 깊었다.
은행잎도 바닥으로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다.
그래도 지리산 깊은 곳엘 가면 나를 반겨 줄 가을이 남아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떠난 임이 행여나 잊지 못하여 뒤 따라오는 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가을이 나를 기다리며 뒤 돌아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는 한나절 휴가를 받았다.
“떠나는 가을을 배웅해 주고 오겠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의 그 애틋한 사정을 뉘 알아주겠는가 싶어 말없이 떠나왔다.
내 생각이 옳았다.
가을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따라 햇빛은 무결점으로 오후의 주천 들녘을 보듬고 있었다.
그 빛을 받아 산수유 열매가 타고 있었다.
외평마을을 지나 재뜰 참나무 군락지는 이파리가 떨어져 땅이 푹신했고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숲을 깨웠다.
이파리들이 비에 녹아 소리를 멈출 때가 되면 봄이 시작 될 것이다.
제평골은 아직도 만추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부부 은행나무 한 쌍이 온통 천지를 노랗게 물들여 놓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작은 밭떼기에는 은행잎으로 가득했다.
늦가을 오후 세시는 태양과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사선으로 내리쬐는 광선에 눈이 부신 나뭇잎, 그 잎은 뛰놀고 까치밥 하나 남은 제평골 감나무는 그 고독함에 가슴시려워 했다.
오후의 초겨울 하늘은 구름도 마음이 바쁘다.
먹구름이 몰려오다 갑자기 구멍이 뚫리고 그 사이로 늦가을 햇볕이 내리쬐더니 세상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천지가 되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무너미 고개에서 만난 햇빛은 그 짧은 순간에도 오늘 산행의 모든 의미를 다 담아내어 주었다.
물든 이파리에 빛이 반사되고 그 반사된 빛이 다시 하늘로 치솟아 주변을 온통 빛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빛과 이파리가 만들어 낸 그 환상의 조화에 하루 종일 혼자 집을 지키다 주인을 반기는 충실한 강아지럼 나는 어쩔 줄 몰라 뜀박질을 했다.
한 순간의 조화에 이처럼 나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화려한 조명도,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도 날 그렇게 감동시키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짧디 짧은 시간에 태양과 나무 이파리가 만들어 낸 감동의 드라마는 그 어떤 완벽한 스토리 구성보다 더 완벽하였다.
그래서 자연은 늘 날 감동시킨다.
밤재로 가는 길은 팔순이 넘은 어르신들도 즐기기에는 무리가 없을 만큼 완만했다.
덕분에 산동으로 넘어가는 길은 행복 로드가 되어 주었다.
아라비아 양탄자처럼 화려한 낙엽이 숲길을 깔아 놓았는가 하면
어떤 곳은 흑백 톤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 해 주었다.
밤재에서는 남원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광한루는 언제나 향기 나는 장소다.
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가 살아 있는 날까지는 그를 것이다.
내가 지나왔던 운봉고원도 저 멀리에서 손에 잡힐 듯하다.
그 속에서 놀았던 때가 벌써 그립다.
밤재를 넘으면 구례다.
재에는 저마다 샘이 있다.
가슴에 파 놓은 샘이다.
그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다.
나는 재에 올라설 때마다 무릎 꿇고 샘물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관조한다.
멀리 두고 온 아련한 고향도 이 샘에서는 맑게 투영되며
천국으로 떠난 어머니도 재회할 수 있다.
중년의 친구들도 천진난만 한 예전의 그 모습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험한 길로 떠났던 임들도
머슴살이 온 문씨 아저씨도 이 샘물에 투영된다.
그럼으로 나만의 재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남원은 참으로 따스한 고장으로 남을 것이다.
마천, 삼내, 인월의 의좋은 삼형제의 정을 느꼈었고
뜨거운 동편제 한가락에 지리산을 흔들어 대는 떨림도 있었다.
운봉고원에서는 이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었다.
이제 그 남원을 뒤로하고 구례와 남원의 경계인 밤재가
돌담에 걸쳐 있는 사다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밤재 모퉁이에 벗은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몇몇 나무들은 이파리들이 나부꼈지만 대부분 전라의 모습이었다.
그 가지들 사이로 회색의 하늘이 보였다.
이파리가 자리를 양보한 덕분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하늘이 가지를 통해서 보이기 시작했다.
빈 하늘을 보는 것 보다 이처럼 나뭇가지 사이로 보는 하늘은 더 운치가 있다.
詩가 가지에서 움트고 바이올린이 가지에서 그 고운 소리를 켜 주었다.
너를 통하여 하늘을 본다
너를 통해서만 바람이 불고
너를 통해서만 햇빛이 비추이고
너를 통해서만 세월이 흐른다
내 품에 너를 품으면
내 품속엔 하늘이 비추이고 바람이 불고 햇빛이 비친다.
이제 너에게 별을 허하노라
달을 허하고 바람을 허하노라
저 멀리 노고단이 밤재와 눈을 맞추고 태양은 무등산으로 잦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