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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환의 지리산별곡 제23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길에 다시 서서
조문환 기자    2017-12-06 16:19 죄회수  10743 추천수 3 덧글수 2 English Translation Simplified Chinese Translation Japanese Translation French Translation Russian Translation 인쇄  저장  주소복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길에 다시 서서

(하동군 부춘 ~ 입석마을)

 

 

출발과 끝이 같은 지점이라면, 이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지난 해 1, 나는 문득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다.

섬진강을 그와 함께 손잡고 걸어 본 경험이 있기에

지리산과 호흡을 같이 해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생겼었다.

 

내가 출발점으로 삼은 곳은 악양면 봉대길 100번지에서 열 걸음 정도 걸어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대촌마을과 입석마을의 경계점 정도 될 삼거리에서부터였다.


둘레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고가는 생활을 하다 보니 둘레길과는 이미 친구가 된 상황이었다.

어언 1년하고 2개월이 지났다.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나의 둘레길 답사도 다시 시작점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동안 사계절을 같이 했고

지리산이 계절에 맞춰 얼마나 아름다운 색깔로 옷 갈아입는지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와 버드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산짐승들은 작은 바위 위에 똥을 누는 것을 즐겨 한다는 것도 배웠다.

정확히 오르막만큼 내리막이 있다는 것도 지리산이 가르쳐 주었다.

혼자 걸을 때는 고독을, 그렇지만 혼자만의 대화가 이처럼 즐거운지를 알게 되었다.

 

산을 높이 올라갈수록 내가 작아진다는 것도 지리산을 돌면서 깨달은 이치다.

산은 스스로 커지지 않지만 사람을 키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섬진강 답사의 경우 시작과 종점이 극과 극이다.

대부분 산비탈 좁은 골짜기 옹달샘에서 출발하여 넓은 바다에서 그 종점을 맞이한다.

 

산의 경우는 좀 다르다.

출발점이 종점이고 종점이 다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길이 둘레길이다.

3월 중순의 지리산자락은 온통 매화로 옷 갈아입는 계절이다.

내가 사는 평사리는 일찌감치 매화가 만개하였고

일찍 피었던 매화는 바람에 눈처럼 흩날릴 시기다.

 

오늘의 출발점인 부춘마을은 지대가 높아서인지 아직까지 매화가 한창이다.

매화가 녹차 밭과 어울릴 때는 환상의 하모니를 연출한다.

원색의 초록에 하얀 눈이 덮인 것 같은 매화나무와의 조합은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어울림은 없을 것이다.

 

부춘과 신기마을 중간 즈음의 비탈면에 자리한 녹차 밭은

아마 내가 아는 대한민국 다원 중에서도 가장 멋진 곳이다.

 

다원 중간 즈음에 십자로 같은 소로가 열려 있고

곳곳에 눈 덮인 것처럼 매화가 피어 있는 모습은 차 한 잔의 여유와 견줄 만하다.

 

서울의 종로 거리나 미국의 맨해튼 거리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부춘마을은 옛날에는 꽤나 큰 동네였다.

비록 산비탈에 있는 마을이지만 부자들도 많았지 싶다.

그래서 부춘이었겠지.

 

이 마을에는 작은 마을이 딸려 있었는데 배나무골이다.

배나무골에 가면 옛날에 이곳도 제법 큰 마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담벼락이 남아 있고 집이 있었던 터와 감나무와 배나무들이 아직도 동네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농촌 마을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 마을도 한때는 도시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근래 들어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다시 하나 둘 씩 모여들고 있다.

다시 부춘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형제봉의 칠부능선 쯤을 넘는 것이 오늘의 과업이다.

그 곳에 서면 섬진강이 평사리들판을 지나 하얀 백사장을 가르며

그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고 돌아갈 것을 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었다.

 

형제봉에서 날개라도 달고 평사리들판으로 뛰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을 것이라는 예감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초반부터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상부에는 아직도 늦겨울의 정취가 살아 있었다.

가는 나뭇가지에 아직도 싹을 틔우지 못하는 나무눈들이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빼곡한 숲 사이로 한줄기 빛이 내리쬐어 손을 갔다 대어 보았다.

어릴 적에 돋보기로 빛을 모아 종이에 불을 붙였던 추억도 반추해 보았다.

 

내 지리적 감각으로는 능선 하나만 넘으면 바로 악양과 화개의 경계인 형제봉 능선에 도달 할 것 같았지만

세 개 네 개를 넘어도 또 다른 능선이 나타났다.

 

희망은 늘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정상 쪽의 하늘이 밝아 오더니

저 멀리 뽀얗게 평사리 백사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 섬진강이다.

  

 

늘 보아도 또 보고 싶은 나의 강이다.

빼곡한 잔가지 사이로 강물도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 출발 할 때 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짓해 주었던 그 강이다.

 

한참을 응시해 본다.

그가 흘러왔을 그 여정도 음미 해 본다.

이제 내가 산이 아닌 강을 만나야 함을 깨달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겠다.

 

평사리들이라고 부르는 무딤이들은 보리가 자라 옥색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하다.

 

당나라 소정방장군이 와서 자기 고향과 너무 닮았다고 해서 악양이라 했고

그 곳의 호수와 닮았다 해서 동정호라고 부르는 호수가 부부송을 반영하고 있다.

 

막대기로 톡 치면 닿을 곳에 있을 것 같은 고소성이

섬진강변 산자락에 허리를 잘록하게 하고 강과 들판을 응시하고 있다.

 

일찍이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라 하는데,

그 성 아랫마을의 이름이 외둔이다.

이를 볼 때 이 지역이 군사적 성격이 짙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돌을 던지면 닿을 것만 같은 곳에 있는 구재봉은

늘 형제봉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섬진강과 평사리들판을 지켜보고 있다.

 

이 두 개의 봉우리는 지리산의 최남단을 형성하고 있는데

내 표현 식으로 하자면 백두대간의 시작점이다.

 

남해바다의 물이 섬진강으로 치고 올라오면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형제봉과 구제봉이 물을 열심히 길어 올려 천왕봉을 적시고

소백산과 태백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백두산으로 그 물길을 퍼 날랐을 것이다.

 

그러니 백두선 천지는 섬진강에서 길어 올린 물일게다.

아니 남해바다 다도해에서 섬들을 흔들어 놓았을 파도일게 분명하다.

 

나의 상상이지만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여기가 백두대간의 뿌리라고,

이곳에서 대한의 정기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다.

 

 

악양이라는 곳은 참으로 특별한 곳이다.

특별한 기운이 흐르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동네다.

 

전국에서 지형을 좀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 어디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악양을 꼽는다.

 

그래서인지 십여 년 전 부터는 이곳 악양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도 그를 것이 물 좋고 산 좋고 사람 좋으면 다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 또한 지리산이 만들어 놓은 풍토와 기질임에 더할 말 없다.

그러니 지리산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신 분들은 모두 아침마다 지리산에 큰 절 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악양은 골이 넓기도 하지만 산에서 보면 꼭 손바닥 안에 놓여 있는 것처럼 정겹다.

한눈에 골을 다 관찰할 수 있으니 면정을 펼치기도 여간 편하다고 한다.

그랬으니 옛날부터 부자가 많고 인물도 많이 났다.

이제 하산을 해야 할 시간이다.

평사리들판과 섬진강을 보고 있노라면 꼭 베드로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조금 더 내려가니 일찍 피어난 진달래가 불을 지른 산처럼 타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종착지, 아니 새로운 출발점인 평사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나의 몸과 마음가짐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진달래로 옷 해 입고 매화로 날개를 달고 평사리들판을 날아 보고 싶어져다.

 

나는 평사리들판을 날고 있다.

부부송 아래 서희와 길상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웃음헤푼 용이네가 웃음 짓고 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평사리백사장에 철없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상류로 이사 온 재첩네 가족들이 백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지난 일 년의 시간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지리산 둘레길,

행복의 길, 행복의 시간이었다.

 

나의 시선은 이제 지리산 능선을 향하고 있다.

마치 구름 위에서 춤추는 것처럼 능선을 거닐면서

천하를 내 발 아래 두고 호령이라도 하듯 소리 질러 보고 싶다.

 

골짜기들, 마을들,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더 진한 가슴으로 만나보고 싶어진다.

 

천왕봉이 내 손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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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mstick   2017-12-09 22:57 수정삭제답글  신고
진한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골짜기들 마을들.. 그립습니다
중간마진   2017-12-08 09:43 수정삭제답글  신고
세월이 흘러감을 자연속에서 느낌이 부럽습니다
회색빛 도심에서의 세월보다 속도가 느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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