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채 이슬이 멈추기 전 이른 아침, 평사리에서 만난 "슬픈 눈을 가진 할머니"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1973년 이후 38년 만에 가장 빨리 하동을 찾아온 장마라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2011년 6월 9일입니다.
건강검진 차 진주로 가는 길에 주먹만한 빗방울이 차를 후려갈겼습니다.
‘이거 한방 맞으면 죽겠지?’
아내에게 건넨 말이었습니다.
이 장마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비 오는 날이 좋기 때문에 잔잔히 내리는 비가 여름 내내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폭우로 절대 피해는 없기....
~~~~호호 순전히 제 욕심입니다.
어떻던 우중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 하는 지혜가 필요할 듯 합니다.
매실 수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오후시간이면 읍내 매실도매상이나 각 농협농산물 집하장에는 이고 진 매실농부들이 줄지어 나섭니다.
오늘 현재 킬로그램 당 2천원이랍니다.
오, 더 이상 매실 값이 떨어지면 곤란한데....
매실 돈으로 여유자금 좀 생겼으면,
아니 농협에 빚이라도 좀 갚았으면,
작은 놈 2학기 대학등록금 반에 반값이라도 댈 수 있으면,
손자 녀석 스마트폰 사 주어야 하는데,
딸자식 서울 전세 값 올려달라고 하고,
......
저마다 사연은 가지가지겠지요.
어떻던 매실은 여러 가지 파급효과도 올리고 있습니다.
택배업체는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가 됩니다.
연쇄점과 마트에서는 설탕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눈 깜짝할 새 팔려나갑니다.
모처럼 집에서 시간만 죽이고 사시던 노인들도 쉴 틈이 없습니다.
모두모두 매실로 한 몫 챙기기를 소망하면서.....
‘오늘은 가족사랑 실천의 날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셔서 가족과 함께 ....’
사실 그 방송이 울려도 집으로 바로 돌아갈 수 없는 환경에 있지만
어떻던 집으로 빨리 돌아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합니다.
그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 저에게 발생했습니다.
창문으로 향긋한 보릿대 태우는 냄새가 진동한 것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꼭 보릿대 태우는 장면을 사진기에 담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기 때문입니다.
보릿대는 한 순간에 타 버리는 습성이 있기에
후다닥, 책상문을 잠그고 연기를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젊은 부부의 모습이 베일을 벗어나듯 드러났습니다.
바람에 따라 연기의 방행이 수시로 바뀌고, 바로 옆 군청사를 뒤덮다가
저 멀리 읍내까지 온통 연기속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어릴적 보릿대 태우는 것은 아이들 몫이기도 했습니다.
내 작은 힘으로도 큰일을 치를 수 있다는 표본적인 사건이기도 했고,
불을 넘나들면서 마치 전쟁터의 장군이라도 된 듯한 으기양양함,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임무를 완수해 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갈쿠리로 불을 들어 날으면서 굽었던 대갈쿠리가 쫙 펴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버지로부터 갈쿠리를 다 태워먹었다고 꾸지람도 들었지만
어떻던 나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집어삼켰던 순간을 연출한 것만으로도
즐겁고 신났었던 하루였습니다.
(모암주막의 아이콘, 배대순여사님...그 함박웃음 좀 보세요. 백만불짜리 아닌가요?)
해학과 통찰이 번뜩이는 정치1번지 모암주막
초강력 화력과 자금으로 무장한 대기업들이 시골의 작은 5일장까지 점령하여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시장상인들을 일격에 물리쳐 버리고, 온 시장을 초토화시키는 일들이 전국에서 일상 다반사격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를 막아보기 위해서 SSM 방지법이니, 재래시장 살리기니 하면서 갖은 노력을 다해 막아낼 방도를 만들어 보지만 막강한 재력과 화력을 겸비한 대기업을 당해 낼 재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장이 살기 위해서는 시장에 사람냄새가 나도록 하는 것이 그 어떤 강력한 법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믿음입니다.
내 가게가 아니라 ‘우리시장’이라는 공동체의식, 상도를 알고 문화를 아는 시장상인들의 의식변화가 무엇보다 선결조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막강한 화력도 끄떡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면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나눠주고, 이웃에게 재미와 해학을 나눠주는 주막이 있다면 한 번 가 보고 싶지 않으신지요?
바로 모암주막입니다.
아직 채 이른 아침의 고요가 깨어나기 전, 세이암을 찾는 길목에서 만난 모암주막은 아침손님으로 주막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침 해장을 하기 위해 오신 분들이 아니라 이웃 집 자녀 결혼식이 있어 품앗이 차 관광버스를 타고 멀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한 분들이었습니다.
모암주막이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 것은 주막을 지켜오고 있는 배대순 여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갔던 그날도 아침 일찍 마루를 점령한 마을 주민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주민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화개면에서 면서기 생활을 두 번이나 했기 때문에 화개면 주민들의 생활상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출장을 갈 때 한 번 씩 들러보면 방에 가득 찬 마을 손님들 시중에도 늘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계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모암주막은 그냥 그렇고 그런 보통 주막이 아닙니다.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이기도 하지만 이 작은 주막에서 나눠지는 얘기들은 동네의 소소한 소문은 물론, 국내정치 나아가 국제 이슈까지 지역과 장소, 시공을 초월한 대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국내 정치1번지라고 하는 종로나 여의도가 때로는 야합과 싸움박질로 난동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 하동 땅 모암의 정치1번지는 해학과 통찰이 살아 있는 미래형 꿈의 정치1번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새 어른들은 비록 산골짜기에서 밭 뙤기 몇 평 갈아먹더라도 그 속에 지닌 지혜와 통찰력은 여의도 어느 유력 정치인 못지않은 삶에서 배여 나온 그들만의 지혜와 여유, 해학이 살아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지매 저를 아시겠습니까?
저 옛날에 여기 근무 했다 아입니까?‘
‘아! 알다 마다, 왔소! 아침일찍 우짠이이요?’
‘예, 지나다가 옛 기억이 나서 왔다 아입니까!’
‘잘 지내지 예?’
‘덕택에 잘 지내지 뭐’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떠날려니
‘아침은 먹었소?’
‘아니요, 나중에 집에 가서 먹을 라고요’
‘아이고 배 고플긴디, 내려가면서 들러요’
‘예 그럴께요, 고맙심더!’
모암주막이 이처럼 생명력을 지니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된 것은
돈이 아니라 오로지 그 속에서 넉넉한 이웃의 정을 나누고 사람을 사랑하는
배대순 여사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배여사님! 오래오래 모암주막을 지키면서 사람 사는 냄새 많이 풍겨 주이소!
(초생달 모양의 독뫼골 앞들, 모내기 준비작업이 한창입니다. "올해도 풍년되이소!")
독뫼골을 보면 청암골은 다 봤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살아가고 앞으로 농촌에서 살아갈 저 또한 향후 농촌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는 늘 의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자고나면 이웃이 도시로 떠나버리던 어릴적 기억이 너무 생생하고 지금에 와서는 결국 농촌은 텅텅비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1960년대 하동의 인구는 16만여명, 현재는 5만2천명선입니다. 불과 30년여 만에 10만명이 떠나거나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근래에는 이농보다는 농촌인구 감소의 주요인은 자연감소라고 보여집니다.
이제는 농촌은 물론 중소도시에서도 산부인과를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듯이 농촌에서 아이 울음소리 듣는 것은 희귀한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임산부는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출산용품에다 철분제, 정기방문 검진, 출산 후 아이돌봄이 지원은 물론 출산장려금까지 두둑히 지급됩니다. 그러나 이런 극진한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배부른 임산부를 찾아보기는 힘든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농촌이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요새 귀농이 부쩍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농업무와 별로 관련이 없는 저에게도 귀농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것은 그런 느낌을 갖기에도 충분합니다. 지난 해 하동의 귀농은 100세대였습니다. 올해는 150세대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경남에서는 두 번째, 전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농촌이 새로운 형태의 주거공간으로 부각되고 이것이 점점 발전되어 도시중심의 산업사회나 정보화 사회를 넘어 농촌이 Dream Society를 이끌고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인간집합체나 사회조직으로 진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것은 산업화와 정보화로 인한 피로증세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회귀본능을 자극하여 인류의 탄생지인 산과 들, 강으로 회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말에 찾은 청암면 독뫼골은 하동군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마을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는 다소 어두운 전망을 할 수 밖에 없으나 농촌다움의 탁월한 자연경관으로 쥐구멍에도 햇빛을 볼 수 있다는 양면적 느낌을 갖게한 동네였습니다.
독뫼골은 그 느낌에서 알 수 있듯이 청학동으로 가는 계곡의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높은 도로에서 내려다 뵈는 독뫼골의 다랭이 논은 그림 그 자체였습니다. 초생달을 얹어 놓은 듯한 가냘픔, 흐르는 계곡이 마치 엄마팔로 감싸주는 듯한 포근함....
"아! 독뫼골을 보면 청학골을 다 보는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날은 8순이 다 되어가는 농부가 경운기로 모내기를 위해 논을 갈고 있었습니다.
독뫼골 앞들은 한 명의 농부가 다 경작을 하면 딱 맞을 듯한 작은 들입니다. 작은 계곡에 경운기소리는 메아리로 되돌아 왔습니다. 다랭이 논 사이에 숨었다 나왔다 하는 농부의 모습이 멀리 길 위에서는 하나의 점처럼 보였습니다.
계곡 건너 마을로 가는 길을 찾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그 곳에 마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마을진입로는 마치 농로마냥 초라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시기에 놓았음직한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니 다 해봐야 10세대나 될까? 하는 초미니 동네가 산언저리에 숨어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써레질하는 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습니다.
아니 마치 그 쪽으로 빨려들어 갔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 할 것입니다. 의도적 행동이 아니라 본능적이었습니다. 논두렁에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 마다 느끼는 포근한 촉감이 행복감을 자극했습니다. 카메라를 멘 이방인이 오는가 마는가는 농부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손으로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가도 말을 걸기는 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관심끌기가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마을로 걸음을 옮기니 아주머니 한 분이 힘든 몸을 이끌고 마을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논갈이 하는 그 농부의 아내였습니다.
아주머니는 75세정도 되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바깥 어른이 식사는 물론 농삿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어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아래채 마루에 걸터앉아 이런 저런 얘길 나누니 경운기 수리를 위해 부속을 가지러 바깥어른 돌아왔습니다.
말을 걸기도 전에
"나락 수매가가 한가마니에 20만원은 해야 하는디... 이래가지고는 농사도 못지어..."
하면서 도구를 챙겨 나가버렸습니다.
독뫼골은 많았을 때에는 10세대가 살았는데 지금은 딱 세 가구 여섯 명이 동네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마을 골목을 올라가니 담 넘어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나물을 삶아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그 다 팔면 얼마나 돼요?"
"20킬로 쯤 되는데 5만원 될까?............"
한 마당 널린 나물이 다 팔아야 5만원이랍니다.
그냥 확 다 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 팔아도 5만원이니 중국집 탕수육 두 접시 값밖에 안 되는 것을 그것도 며칠 동안 산을 헤메고 다니면서 따다가 삶고 말려서 내다 팔아야 돈이 되는 것입니다.
"돈 귀한 줄 알아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과 몇 십미터도 안되는 마을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아! 이것이 우리 농촌의 미래인가?
이대로 농촌은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인가?
독뫼골만 하더라도 10년을 기약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지난 마을이 비단 독뫼골 뿐 아닙니다. 귀농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평야지대나 경관이 수려한 곳, 교통이 편리하며 도시형태의 주거공간을 지닌 읍내나 면 소재지를 제외한 전형적 전통농업을 계승하고 있는 마을은 비슷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난 아주머니는 관절염에다 혈압까지 높아 "벌겋게"달아오른 얼굴로 장독에서 뭔가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 아주머니는 계곡 옆에서 민박을 하면서 백숙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와서 먹어 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주머니 저 갈게요. 여름에 한 번 올께요"
독뫼골,
계곡 언저리에 놓인 다랭이논의 초생달의 싸늘함처럼 내일에 대한 기대 또한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농촌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아니 미래사회는 농촌만이 희망임을 믿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류는 산업화와 정보화의 강을 건넜기 때문이며 인간의 본성을 믿기 때문이고 누구나 순수한 대 자연을 꿈꾸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독뫼골이 쌍뫼골, 다뫼골이 되길 기대합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