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리들판 - 서정하동의 아이콘, 오월을 맞아 청보리밭 물결에 멀미를 느끼게 하는 곳 입니다)
청보리 물결에 멀미하는 오월
하동의 5월은 청보리 춤추는 계절,
서희와 길상이가 정담을 나누었던 평사리 무딤이 들판에도,
읍내를 품고 있는 너뱅이들에도,
남해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대치 진구지벌에도
청보리는
때로는 잔잔한 물결로,
때로는 큰 파도로 온 대지를 출렁이게 합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무딤이 들판에 선 저는
마치 청보리밭 멀미라도 할 듯 했습니다.
보리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보리밥 도시락이 부끄러워 꽁보리밥은 도시락 밑에 담고
하얀 쌀밥은 따로 제쳐두었다가 꽁보리밥을 덮는 ‘위장전술용’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가난과 부끄러움,
그리고 숨기고 싶은 나의 치부와도 같았던 존재였습니다.
그랬던 천덕꾸러기 보리가 요새는 식당에서 ‘별미’로 팔려나가고
청보리밭 축제는 최고의 서정성이 담긴 축제로 탈바꿈되어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추억을 팔고 있습니다.
이 청보리 밭도 불과 보름만 지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 할 것입니다.
세월이 그냥 그대로 머무르지 않듯이,
청보리 밭도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길 것입니다.
올해의 청보리 밭이 변심하기 전에 하동으로 오셔서
청보리밭 멀미를 경험 해 보시는 것도 행복일 것입니다.
(섬진강 가의 녹음을 운무 속에서 보여 주는 전남 광양시 다압면 백운산 자락)
(평사리 백사장도 거대한 캔버스로 변했습니다. 하동땅은 거대한 대지미술관으로 변모되었습니다)
드디어 축제의 계절, 나를 키운 8할은 축제
5월의 시작과 함께 전국은 축제로 들떠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약 일천오백여개의 축제가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민선 자치단체 출범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축제만큼 지역을 알리는 좋은 아이템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전국적으로 축제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고장이 많습니다.
축제가 없었더라면 이름조차 생소했을 고장이 명문고장으로 발돋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부 부작용도 만만찮기도 했습니다.
“꾼”들의 얼굴 알리기용으로,
치적쌓기용으로 활용되기도 했는가하면
다른 축제 베끼기로 ‘그게 그 축제’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축제만큼 바람을 잘 타는 아이템도 없는 듯합니다.
과거 몇 년 동안 “경제난이다, 천안함이다, 구제역이다”하여
‘이 판국에 축제를 해야만 하느냐?’면서
가장 먼저 칼을 맞는 것 또한 축제였습니다.
지난 겨울에서 봄까지 이어진 구제역으로 지역축제들이 우후죽순처럼 취소되어
한철장사로 먹고살던 축제업계나 특산품업계, 요식업계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한파들이 축제를 강하게 만들고, 축제전문가를 키우며,
경쟁력이 약한 축제를 자연도태시키는 긍적적인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나라 축제의 연륜은 20년 이하입니다.
선도 축제가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
후발 축제는 열 살 내외입니다.
하동의 대표축제는 하동야생차문화축제입니다.
지난 4일부터 8일까지 열렸습니다.
지리산자락에 이슬을 먹고 바위틈에서 자란 야생녹차를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하동야생차축제는 자연주의를 표방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축제를 지향합니다.
무대가 아닌 녹차가 생산되는 다원과 마을, 생산농가와 같은
현장주의를 선호합니다.
올해로 열여섯 번째입니다.
처음에는 쌍계사 경내에서 동네축제로 오붓하게 열리던 것이
이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그 원인을 Best One이 아닌 Only One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제의 창립에서부터 지금까지 땀 흘렸던 공무원과 차농,
자원봉사에 나섰던 군민과 문화예술인들에게 그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저는 열두 번 째에서 열네 번째까지 담당했었습니다.
뒤돌아보니 축제는 저를 키운 바람이자 태풍이고 서리였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
저안에 태풍 몇 개
저안에 천둥 몇 개
저안에 번개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안에 땡볕 두어 달,
저안에 초승달 몇 달,
장석주님의 대추 한 알 이라는 시입니다.
저는 나를 키운 8할은 축제며
또 나를 키운 8할은 섬진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짓누르는 부담감과 무게에 수십 번 죽음을 생각했고
잠들지 못한 밤이 수십 밤이었으며
스트레스성 살이 쪄 불과 3개월 만에 7킬로그램이 늘어났었고
꿈속에서도 축제를 했던 날이 수십 밤이었습니다.
축제를 만들기 위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은 저의 스승이었고
문제와의 싸움과 고뇌는 저를 키운 회초리였습니다.
오늘은 올해 축제의 마지막 날,
축제의 성공을 위해 가슴조이며 뛰어다닐 저의 동료들을 생각합니다.
저가 당했던 그 무게와 고뇌를 고스란히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응원 보내주세요.
그러나 오늘도 저는 저의 동료들에게 말합니다.
“언젠가 축제를 꼭 해보라”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통의 크기에 따라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움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는 진리로 생각합니다.
축제! 너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뛰게 하는 말이다!
너는 너를 만드는 사람들을 짓누르게 할 것이나
너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춤추게 할 것이다!
어버이날에, 이 땅의 모든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버이 날, 부모님께 카네이션 달아주셨습니까?
그리고 자녀들로부터는 꽃 선물을 받으셨습니까?
저는 둘 다 예스!
행운아가 맞죠?
(우리 엄마입니다. 동네에서 멋쟁이라 소문나 있습니다. 멋쟁이 엄마에게 화이팅! 해 주이소)
저는 아직도 엄마라 부릅니다.
우리 엄마는 올해로 아흔입니다.
꼭 1년 전, 뇌출혈로 의식불명이 며칠까지 계속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셔서 지금도 혼자서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엄마가 병원입원 해 계실 때 가장 제 가슴을 찌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엄마라고 부를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시냇물에 멱 감으러 저를 엎고 내려갈 때 느꼈던 그 감촉,
비 올 때 우산을 들고 학교 정문에 홀로 서계셨던 엄마,
중학교 입학식 날, 읍내 사진관에서 둘만의 기념사진을 찍던 일,
초등학교 3학년 어머닛날,
어머니 초청행사에서 짓다 만 학교 건물 잔해 속에서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율동으로 즐겁게 해드린 일,
고등학교 때 강냉이 삶아서 읍내 시장에서 파시던 엄마를 저 멀리서 지켜보던 일,
그 때 엄마는 저가 부끄러워 할 것을 생각해서 저 멀리 떨어져 있으라 하셨습니다.
8년 전, 심신이 몹시 허약해서 걸음을 잘 못 걸으셨을 때
한 번씩 엎어드리던 일,
읍내에 있는 우리집에서 같이 살자고 해도
한사코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
한주에 한 번 꼴로 엄마를 찾아갑니다.
보살펴 드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엄마를 귀찮게 해 드릴 목적입니다.
할 일이 없는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야 할 일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지요.
가장 적절한 일은 엄마가 차리는 밥을 먹어주고
저를 시중들게 하는 것입니다.
밥을 제가 평소에 먹는 양보다 많이 차려주십니다.
"그것 먹고 어떻게 일하느냐!"
그리고 요구르트다 과일이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챙겨주십니다.
그것 먹는 시간에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 하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버이날에 엄마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엄마만이겠습니까?
이 땅에 계시는 엄마는 다 같은 엄마가 아니겠습니까?
사진촬영을 위해 만났던 많은 어머니들,
쑥과 나물을 캐서 아들네 보내 주시겠다던 어머니
녹차 따서 팔아 손자 용돈을 주시겠다던 할머니
..........
제가 만났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객지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살고 계셨습니다.
아직도 농촌에는 우리의 엄마들이 계십니다.
엄마, 배고파요 라면 끓여주세요!
1년 중 가장 살기 좋은 계절,
계절의 여왕이라고 지 받을 정도의 아름다운 계절에
행복하시길 빕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