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가 바라다 보이는 비 그친 오후의 [너뱅이들판], 맥추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봄 속의 가을을 느끼다 - "죽추(竹秋) 그리고 맥추(麥秋)"
비가 갠 오월의 아침 하늘은 사뭇 가을의 정취까지 더하는 날입니다.
3월의 애기 신록에 비하면
5월의 신록은 무성함이요, 푸르름이며 끓는 청춘에 비교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에나 푸른 기운,
한 군데도 죽은 기운을 느낄 수 없는 5월만이 줄 수 있는 정취입니다.
언젠가 사진을 찍기 위해 가을에 갔었던 전라도 진상면 어치계곡,
호수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하늘과 가을을 본 순간
"아! 너무나 아름다워 여기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죽고 싶다"
이런 경험을 해 보셨는지요?
이처럼 용솟음치는 봄의 물결 속에서
오히려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섭리가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요 흥미입니다.
바로 죽추(竹秋) 그리고 맥추(麥秋)입니다.
(청학동의 "죽추(竹秋)", 싱그러움이 더하는 지리산계곡의 신록과 대비되고 있습니다)
요즘 대나무를 유심히 보셨는지요?
그 색깔이 평소보다 누렇다는 느낌을 가져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도시에 사신다면 불행히도 그런 자연의 변화를 느끼시지 못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대나무는 새로 태어나는 자식인 죽순의 성장과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명은 멈추고 모든 에너지와 영양분을 죽순에게 돌린답니다.
그래서 대나무 잎이 누렇게 변하고 이파리가 무수히 떨어지는데
그것을 일컬어 옛부터 "죽추(竹秋)"라고 부른답니다.
물론 맥추(麥秋)는 보리의 가을이지요.
아! 이 미물과도 같은 식물의 희생정신!
사람과 다를 것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대나무가 있는 그 어느 곳이라도 봄 속의 또 다른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 위대한 대 자연의 섭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
우리네 부모님과 같은 자식사랑 마음입니다.
(비 내리는 날 아침, 시의 언덕인 하동공원의 죽추입니다)
세이암, 그 멀고 험했던 관념속의 나의 성지여!
세이암(洗耳岩)을 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동안 세이암은 저에게 있어서 미지의 장소, 관념속의 성지였습니다.
그의 주변을 스쳐지나가 보기는 했으나 그 정확한 위치나 생김새가 늘 궁금한 터였습니다.
단지 아는 것은 바위에 洗耳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 뿐 이었습니다.
세이암은 최치원선생이 지리산에 입산을 하면서
세상에서 들었던 모든 잡음을 벗어버리기 위해 귀를 씻었다는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세이암 가는 날 이른 아침은 조용하고 맑고 청아한 날이었습니다.
벚나무는 신록으로 터널이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터널을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황홀하고 충만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주에 한번 꼴 이상은 다니는 길이요 장소지만 늘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입니다.
어느새 세이암이 있는 신흥마을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었습니다.
세이암은 저에게 관념의 장소요, 미지의 세계며, 성지와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청학동을 찾아 나섰으나 청학동을 찾지 못했던 역사의 인물들 처럼,
그날 아침 나에게 있어서 세이암은 또 다른 청학동이었습니다.
마치 늘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으나 공기의 존재나 가치를 잊고 사는 것처럼
세이암의 존재를 알고는 있으나 관념속의 세이암을 찾아 나서는
구도자와 같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주소를 들고 주변에서 뺑뺑이를 도는 사람과 같이
저의 관념속의 세이암은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도로변이나 마을 입구에 큰 바위로 서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년이 넘는 공직생활 동안에 한 번도 그 곳에 가 보리라 마음먹지 못했습니다.
"그 곳 어디쯤에 있을 거야!"늘 관념의 존재, 상상속의 존재였습니다.
혼자 속으로 "그것도 모르느냐? 무심한 놈 같으니!"
라는 꾸중이 저 속에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뺑뺑이를 돌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이암이 있는 신흥마을에서 이장을 하고 있는 친구 최효성에게 전화를 했으나
오랜 발신음만 들려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출근해 있을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지척에 두고 이렇게 헤매고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한 놈이야, 매일 같이 다니면서도 아직 그 위치도 모르고 있다니!"
알려준 곳에 주차를 하고 내리니 올해 우리 엄마와 동갑인 할머니가
혼자 마루를 청소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 세이암이 어디예요?
"이리로 내려가면 돼, 저 밑이야"
할머니는 친구를 만난 듯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아흔이라고 믿기지 않게 목소리도 그렁그렁하셨고
기력도 건강해 보였습니다.
세이암이 있는 곳은 여름 피서철에 최고의 피서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많이 있어 물놀이하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봄에 잦은 비로 계곡의 물은 많이 불어나 있었습니다.
계곡 건너 어디쯤에 세이암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물을 건너느냐였습니다.
카메라만 없다면 옷을 버릴 각오를 하고 건너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보물 1호인 카메라였습니다.
분명 저기에 세이암이 있는데, 어떻게 한다?
그냥 돌아가자니 여기까지 찾아 나선 시간과 걸음이 아깝고,
물을 건너자니 혹시 잘 못하다 미끄러지기나 한다면 수백만원이 넘는 카메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양갈래로 흔들렸습니다.
그 때에 저의 머리를 때리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카메라를 버릴려면 버리리라!"
신발과 양말을 벗었습니다.
카메라는 혹 미끄러져 넘어지더라도 크게 손상이 가지 않도록 어깨에 걸쳐 옆구리 쪽에 단단히 찼습니다.
바위는 미끄러워 발 한 번 잘못 디디는 날이면 계곡물에 빠지기 쉬워보였습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바지만 많이 적시고 위험천만하게 계곡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순간 쾌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 이제 세이암을 볼 수 있는 가 보다!"
그러나 세이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대문짝만하게 크게 씌여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마트폰에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누군가 친절하게 사진까지 찍어 올려놓았는데 글자만 찍어 놓았을 뿐 바위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크고 작은 바위에는 아마도 이곳을 방문 했던 사람이 새겨 놓았을 음각으로 된 이름들이 여러 곳에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옮기며 두리번거리기를 한참,
뭔가 발밑에 이상한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이암"을 나의 발로 밟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상속의 세이암이 바로 내 발 밑에 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와, 세이암이다!"
세이암을 저의 불경스런 발로 밟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의 사진과 대조해 보니 바로 그 세이암이었습니다.
생각보다는 훨씬 작은 바위,
크게 대문같이 서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바위가 살짝 누워있는 그리 크지 않는 바위였습니다.
순간 저는 보물섬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해 져 있었습니다.
세이암 한 모퉁이에는 작은 야생화가 바위틈에서 나의 "방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세속에 물든 사람아,
여기에서 네 귀나 깨끗이 씻고 내려가라!"는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새 소리가 진동해서 세상의 잡음을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로 지척에 두고 세이암을 찾아 헤매었던 것입니다.
마치 청학동을 찾아 헤메었던 옛 선조들 처럼말입니다.
세이암 바위에 앉아서 폭포수처럼 들리는 물소리와
신록을 노래하는 새 소리를 감상하는 영광을 한참동안 누렸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 또 문제였습니다.
고놈의 카메라 때문입니다.
다시 카메라를 옆구리에 동여맸습니다.
혹시 만에 하나 미끄러져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너와 나는 함께 빠지는 거다....
맨 몸이라면 전혀 위험한 계곡이 아닌 것을 세상의 재물을 탐하자 모든 것이 짐이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점프을 했습니다.
순간 "미끈"
아뿔싸,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 겨우 무릎으로 바위에 슬라이딩 할 수 있었습니다.
"휴! 다행이다, 다행이다"
무릎은 피가 약간 배여 나왔으나 그것은 카메라가 살아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런 댓가지불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와 헤어진 후 약 한 시간만에 돌아왔습니다.
"할머니 다녀왔어요. 세이암을 봤어요"
"봤어? 잘 했어"
"할머니는 120살까지 살 것 같아요"
"죄 돼, 그런 말 하지마"
"아니예요 할머니, 할머니는 진짜 그 때 까지 사실 것 같아요"
"누가 내 나이를 물으면 부끄러워. 너무 오래 살아서 미안해서"
"뭐가 미안해요. 건강하게 사시는 건데"
"안 그래, 미안해. 빨리 죽어야 돼, 가는 줄도 모르고 가야돼는디..."
"할머니 진짜 죽고 싶어요?"
"그렇지,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야, 짐 돼"
저는 할머니들이 빨리 죽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 대하여
늘 그 진정성이 의심되던 차에 할머니를 통하여 들려오는 것은
"진짜 빨리 죽어야 겠다"는 진정성으로 받아들여져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아내와의 약속시간이 생각나서
"할머니 갈게요, 또 올게요"
"벌써가? 더 놀가가지"
"가야돼서요, 또 올게요"
"올 때는 어머니도 모시고 와, 여름에 여기서 놀면 참 좋아"
"예 할머니 꼭 올게요"
하동에 남은 나의 마지막 성지이자 관념속의 청학동은
이렇게 하여 저의 지척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세이암은 저에게 이렇게 말 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나를 만나러 오거든 세상의 재물과 욕심을 내려놓고 오너라"
"겉의 때가 아닌 속의 때를 씻고 오너라"
세이암을 만나고 온 그 다음 날 저녁
친구이자 신흥마을 이장인 최효성이가 카카오톡에 남긴 메시지에 저는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냈습니다.
"세이암 탐방은 잘 하셨는지!"
.....
"죽을 고비와 7백만원짜리 카메라를 버릴 뻔 했다오"
세이암 기행문 쓰기를 마치는 바로 이 시간
그에게서 또 다른 문자가 왔습니다"
"고생하셔 버럿는 감네!
산속의 아침은 새 소리로 시작되엇소
좋은 하루 되시오!"
"덕분에 나의 영원한 성지, 세이암을 만날 수 있었소.
행복했었소!"
(섬진강교 건너 첫 집 신원반점. 양이 대표적 상징이지만 또 다른 특별한 것이 있는 중국음식점)
양으로 승부거는, 그러나 양이 전부가 아닌, 특별한 중국집 신원반점
때로는 식당에 들어가도 내 마음대로 앉지 못하고
때로는 메뉴 선택권도 나에게 없으며,
때로는 곱배기를 시켜도 보통을 고집하며,
때로는 양을 적게 해 달라고 부탁해도 결코 적지 않게 나오며
배달은 물론 되지 않고, 필요할 경우 직접와서 가져가야 하는 식당이 있다면 .....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응답은 어떻게 하시든 현장에서는 대부분 ‘그래도 간다!"인 중국요리 식당이 있습니다.
바로 섬진강 건너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신원리에 있는 "신원반점"입니다.
이 식당은 언제나 만원입니다.
옛날식, 그렇다고 한옥이 아닌 그냥 좀 오래된 시골풍의 보통건물에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어둑어둑한 조명,
겨우 자리를 잡아도 툭툭 던지는 퉁명스러운 주인의 말소리...
무슨 매력이 있을까요?
첫째는 양입니다.
많이 나올 것을 예상하여 적게 시켜도 절대로 적게 나오지 않습니다.
곱배기를 먹고 싶어도 때로는 사람 생김생김을 봐가며
‘당신은 체격조건을 보아 곱배기는 못 당할 것 같으니 보통감이다’로 판단해
곱배기 대신에 보통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손님이 많을 때에 분위기 파악 못하고 먹고 싶은 대로
"나는 짜장면, 나는 짬뽕, 나는 우동 ..."하다간
"오늘은 그것 안돼요, 통일시키세요!"라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그래도 그 결과에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막무가내 식 이 식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것은 왜 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담 없는 편안함, 촌스러움에의 갈증,
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할 양에 대한 만족감과 "재미"
예상치 못할 결과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섬진강 건너 첫 집이라는 일종의 ‘섬진강 특수’가 아닐까 합니다.
저랑 같이 짬뽕 고빼기 한 그릇 해 보실 분은
연락주세요.... 신원반점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
(신원반점 바로 옆에 있는 이제는 폐쇄된 신원검문소. 예전엔 유럽의 국경검문소보다 더 통과하기 어려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