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보색 - 보색이되면 겨울이 되고 동색이되면 여름이다)
여울, 그 작고 섬세한 오케스트라
3월 속에는 여유가 있어 보인다.
숫자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꽁꽁 얼었던 몸도 녹아지고 온 세상이 느려 보인다.
그래서 사람마음이 간사하다고들 하지만 간사한 것이 아니라 여린 것 아닐까?
숫자하나 변화에도 이처럼 온 세상이 다르게 보이니....
실제 섬진강으로 나오니 냄새가 다르다.
공기 속에 향기도 피어오르고,
마치 땡초 한 입 물었을 때 한동안 찡~ 하게 만들었던 느낌과
코끝의 시림과 눈물고임도 없어졌다.
3월은 그렇게 상큼한 바람으로 코끝에서 시작되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강물은 더 파래지고 갈대는 더 노래진다.
강물과 갈대가 동색(同色)이 될 때면 여름이 되고
완전한 보색(補色)이 되면 겨울이 된다.
지난 1월과 2월에 강물은 완전한 남색 그리고 갈대는 진한 노란색이었다.
그렇지만 여름이 되면 강도, 갈대도 완전한 초록으로 동색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동색에서 보색으로, 또 보색에서 동색으로
세상도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계절 따라 반복하나 보다.
오늘은 달길천이 흐르는 양산마을과 그 이름도 유명한 풍혈냉천,
그리고 반용마을과 포동마을까지다.
북에서 남으로 꽂히듯 내려오는 달길천이 섬진강과 합수를 이루고
그 삼각주 너른 방천(防川)의 비탈면 양지쪽에는 누렁이 황소가 긴 하품을 하고 누웠다.
소 팔자 한 번 좋다!
나도 모르게 팔자타령이 나온다.
요즘 소들은 소가 아니다. 상품이다.
공장에서 똑 같이 찍어내는 공산품과 다를 바 없다.
대량으로 소를 키워내는 축사에 가면 전율이 느껴진다.
풀 하나 지푸라기 하나 없이 말라 비틀어진 사료를 먹기 위해
차가운 콘크리트 먹이통을 혀 바닥이 닳도록 핥는다.
그래서 구제역이니 무슨 병이니 하면서 온 세상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죄 없는 소들이 순장을 당하듯,
사람들의 속죄 죄물로 집단무덤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나 또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의 하는 일들이 다 죄스럽고
사람이 가는 곳은 파괴와 무질서로 온 땅을 울리고 있다.
자연이 말할 줄 모른다고, 항변할 줄 모른다고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보기흉한 일만 저지른다.
지금까지 100리길을 걸어온 섬진강에서도
상류치고는 많은 파괴와 무질서가 횡행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했다.
이래가지고 섬진강을 자랑하고 섬진강 곁에 살고 있다는 말 할 자격이 있을지
물어 보고 싶었다.
(달길천의 여유)
다른 소들에 비하면 달길천의 황소는 복덩이다.
세상 어디에 양지쪽에 할 일 없이 누워있는 소가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갈대사이로 마른 소똥들이 곳곳에 보인다.
이것 하나면 소년시절에는 동네 앞 방천을 다 태우고 남았었다.
정월 대보름은 온 들녘이 불놀 터였다.
빡빡머리 소년들은 소똥불 하나 들고 온 들녘을 헤집고 다녔다.
그래서 인지 강가에서 만난 마른 소똥하나가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른다.
상류는 하류에서 느낄 수 없는 울림이 있다.
작은 떨림이다. 그래서 생동감이 더하다.
무던하게 흐르는 하류보다는 재잘거림과 애교가 넘쳐흐른다.
늘 한결같은 하류에서 느낄 수 없는 변화무쌍함이 상류에서는 피어난다.
섬진강을 따라 걷다 보면 민감성이 된다.
육감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모든 세포가 하나의 또렷한 감각기관으로 변한다.
굳이 말하자면 만감(萬感), 억감(億感)이라고 할까?
작은 갈대의 흔들림, 얕은 개울에서 노니는 피라미들의 꼬리흔듦,
고동이라고도 부르는 다슬기의 눈 껌뻑임소리까지 청진기로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다.
이는 들을 귀 있고 볼 수 있는 눈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인지는 모르나,
섬진강이 그렇게 뻣뻣하고 콧대 높은 강이 아닐진대,
어느 누구나에게 들려주는 섬진강만의 소리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섬진강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섬진강으로의 초대장을 보낸다.
섬진강에서 나의 민감성이 가장 잘 발휘되는 곳은 물흐름이 다소 빠르고
얕고 좁아서 정겨움이 흘러내리는 상류지역의 여울이다.
섬진강에서 여울이 가장 잘 형성되어 있는 곳은 바로 이곳 양산마을 앞이다.
여름이면 피라미들이 물살을 가르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같았다.
여울은 강물에 산소를 더하고 물의 충격으로 물을 정화시키는 기능도 한다.
그 여울에 가만 앉아 있노라면 흐르는 물소리가 전에 들었던 물소리가 아니다.
돌 하나의 생김새와 크기와 숫자에 따라 여울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여울속의 화음)
바람의 세기와 방향,
햇빛,
바위와 돌의 생김새와 크기와 그 놓인 모습에 따라
수만 가지의 소리들이 새로운 조합으로 구성되어 뿜어져 나온다.
큰 돌들의 여울은 신세계 고향곡보다 더 웅장함으로,
작은 돌들의 여울은 모차르트 피아노 쏘나타보다 더 경쾌하게...
그 완벽한 화음,
세상 그 어느 오케스트라나 앙상블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묘한 조화
지휘자도, 악단장도 없이 그렇게 천상의 소리를 발하고 있다.
섬진강,
넌 나에게 늘 스승이다.
달길천과 섬진강의 만남으로 이뤄낸 여울의 화음을 들으며 풍혈냉천을 지나니
섬진강은 다시 급격히 휘감아 돌아 반용마을에 이르고
내 느린 걸음은 안단테, 아랫산막들을 지나 포동마을에 이른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