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기다릴게)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구미마을)
치열했던 전장과 같았던 장군목을 돌아서니
정적과 같은 고요가 밀려온다.
‘내가 저 처절했던 전쟁터를 살아서 돌아왔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거북이 전설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구미교위에 서 있다.
저 멀리 무량산과 두류봉 아래 장군목에서는
바위들의 함성이 아직도 울려 퍼지는 듯하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작은 다리 하나에
수 천 년이 넘은 거북이 전설보다 더 아름다운 얘기가 다리 입구에 서 있다.
이 구미교는 1983년에 건설된 것으로
당시 국회의원과 군수의 끈질긴 노력과 지역주민의 교량건설의 의지가
이루어 낸 산물이었다.
특히 교량건설비용의 육분지 일을 지역출신 재일교포가 부담하였는데
이러한 분들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구미교 앞에 자랑스럽게 서 있다.
이처럼 역사는 몇몇의 위대한 영웅들에 의해 쓰여 지지만,
그 역사는 이 땅을 묵묵히 살아왔던 민중들의 잔등 위에 쓰여 진 것이다.
그러니 서러워 마시라 민중이여!
자만하지 마시라 위대한 영웅들이여!
(날 무릎꿇게 하였다 너희들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서도 가장 귀한 것은
고요 속에 들려오는 대 자연의 소리를 듣는 즐거움 아닐까한다.
이는 나를 낮출 때,
내 마음을 비울 때,
자연을 향해 내 무릎을 꿇고 내 귀를 열었을 때
주어지는 보물이리라!
그러나 어쩌면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 때문이며,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지만,
섬진강에 나를 내려놓고 홀로 설 수 있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리라.
그것이 섬진강이 가진 마력이다.
한동안, 아니 아직도 나는 이명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무엇이 원인인지 나도, 의사도,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짐작컨대
내가 세상사에 너무 깊이 빠진 탓이요,
세상 욕심이 과한 탓이며,
세상 소음에 내 귀가 심하게 노출된 탓이 아니겠는가?
자연 속에서 얼마나 겸손해지고 고요히 머리 숙일 수 있는지가
내면의 행복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내가 무릎 꿇는 일은 쉬 있는 일이 아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섬진강가에 나서기만 하면 내 무릎이 닳도록 꿇어지니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무릎 꿇게 하는 섬진강, 그 위대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그에게 투영됨으로서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네 모습속에서 나를 본다)
섬진강 속에 비치는 것은
구름, 하늘, 바람, 나무, 꽃, 그리고 산 그림자, 바위 .....
그러나 섬진강에 서면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내가 보인다.
강가에 홀로선 나의 모습
내가 미소 지을 땐 섬진강은 함박웃음 웃어주었고
내가 슬플 땐 그도 눈물 흘려주었으며
내가 고독했을 때엔 그도 깊은 외로움에 힘들어했었다.
내가 기뻐했을 땐 그는 춤추듯 날뛰었고
내가 맥없어 기운 잃을 땐 그는 숨죽여 주었다.
오늘 내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 속에서 나를 읽는다.
너의 표정 속에 남아 있는 상처 입은 그루터기는
나의 성숙되지 못한 언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의 편애, 편력, 질투와 아집 그리고 미움...
이것이 너에게 상처 입은 그루터기와 굳어버린 옹이를 남겼다.
네 속에 남아 있는 그루터기여, 옹이여!
부디 네 위에서 새로운 순이 돋아나 푸르름을 세상에 선물하기를...
(당신들 속에서 나를 봅니다)
섬진강!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는 거야!
네 위에 투영된 것만이 진짜 나 일 뿐이야!
거울 속에 보여 지는 나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아니 진짜 내가 아닌 가짜의 나일 것이 분명해
그래서 너를 통해서 진짜 나를 보는 거야!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