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에 맺힌 옥구슬)
아침 이슬은 풀잎 끝에 맺힐 때 더 아름답다.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입석마을)
계절이 질서를 잃은 지 오래다.
한창 장맛비가 내릴 시기지만 전국이 가뭄으로 목이 탄다.
작년 여름은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다.
그렇게 비가 순간적으로 퍼 붓는 것을 아직도 본 기억이 없다.
온 산하를 찢어 놓았고 인간들을 향해 보라는 듯이 폭격을 퍼 부었다.
가만 보면 인간의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르긴 모르되 이 가뭄이 끝나면 또 물난리에
차라리 가물었던 시절이 더 그리워 질 수 있을 때가 분명 오게 될 것이다.
‘인재다 천재다’ 하면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급기야는 하늘에 대고 원망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섬진강은 또 위기일발의 사태를 준비해야 한다.
가물 때 쫄쫄 굶어서 배고프고,
장마나 폭우철이 되면 갑자기 불어나는 물을 제 혼자 다 삼켜야 한다.
이런 일들은 이제 섬진강에게는 이력이 난 셈이다.
(한 줄기 빛, 숲을 깨우다)
아직 미명과도 같은 시간에 섬진강으로 향했다.
섬진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시간은 늘 상기된다.
오늘 내가 걷는 섬진강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장면이 내가 처음 보는 장면이요,
내 발 밑에 밟히는 땅들도 내가 처음 밟아보는 땅이며,
언덕 밑에 졸졸졸 흐르는 강 물결도 내가 처음 듣는 소리들이다.
그래서 섬진강을 향해 나설 때 마다 늘 새롭고 기대가 충만해 진다.
우기 기운 때문인지 상류로 갈수록 운무가 가득 산을 메웠다.
저 멀리 산꼭대기가 마치 갓을 엎어 놓은 것처럼 뾰쪽이 나와 있기도 하고
어떤 산들은 젖먹이 애기들의 고운 엉덩이처럼
겸연쩍게 보드라운 살결을 살포시 드러낸 것들도 있다.
바람결에 따라 안개가 이동하고 요동칠 때마다 산들이 움직인다.
큰 산들이 여기 갔다가 저기로 달아나고
순식간에 산 아래 마을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계곡과 강의 만남으로 심한 기류변화를 일으키는가 보다.
오늘은 이 안개 속에서 나도 같이 놀아야 한다.
그들의 움직임에 나도 따라야 하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기류에 나도 몸을 맡겨야 할 상황이다.
가끔씩 짙은 안개사이로 태양이 뚫고 들어와 새로운 천지를 빚어낸다.
숲 속의 빽빽한 나무들을 사이로 태양빛이 투과하고
그 사이에 운무가 얹힐 때에는 마치 한 장면의 오페라의 무대가 연상된다.
옅은 연무들 사이에 움직이는 배우들,
현란한 조명들이 배우들 사이를 오가며 몽환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듯하다.
그 빛들 중에 몇몇 가락이 내가 걷는 오솔길로 빠져 길 옆 풀잎에 내려와
살포시 얹힌다.
찰나와도 같은 시간에 번뜩 빛나는 물체....
순간적으로 엎드려 보니 풀잎 끝에 맺힌 작은 이슬 한 방울이다.
전율이 느껴졌다.
이것은 내가 본 아름다움 중에 최고의 장면이었다.
그 뾰족하고 가냘픈 풀잎에 위험스러이 매달려 있는 풀 잎 한 방울,
짙은 안개사이로 태양빛이 뚫고 들어와 만들어낸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암흑과도 같은 새벽 녘,
밤의 정기를 모아 만들어진 한 방울의 이슬은 섬진강의 魂이다.
낭떠러지와도 같은 풀잎 끝에 매달려 하루아침을 맞는다.
한 밤이 새도록 차가운 공기 속에서 물방울 한 알 만들어
이렇게 신비로움을 만들었다.
너의 그 수고로움이 이 찬란한 玉露를 만들었다.
(이 한 방울을 만들기 위해 잠도 자지 않았다)
한밤을 자지 않고 수고한 노력,
너는 이슬 한 방울이라도 되어 보았느냐?
이슬 한 방울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수고를 해 보았느냐?
가냘픈 풀 잎 끝에 매달릴 만큼의 위험을 감수해 보았느냐?
풀잎 끝에 매달릴 만큼 다른 이를 신뢰해 보았느냐?
이슬 한 방울 만큼 정결하고 순수해 보았느냐?
이슬 한 방울 만큼 영롱하고 찬란해 보았느냐?
이슬 한 방울 만큼 투명하고 맑아 보았느냐?
이슬 한 방울처럼 그 속에 세상을 다 투영시켜 보았느냐?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이슬 한 방울처럼 너의 본분을 참아내었느냐?
비록 아침 바람에 흔들려 순간에 떨어져 버리고
한 줄의 태양빛으로 순간에 말라버릴 운명임을 알면서도
너 그렇게 너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낸 이슬 한 방울처럼 세월을 살아봤느냐?
..........
(널 기억하겠어!)
영롱한 아침이슬을 창조해 낸 섬진강이 쏟아내는 우레와 같은 음성이
내 귓전을 수없이 때려댄다.
비록 한 줄기의 태양빛에 말라버릴 지라도,
도둑 같은 바람이 불어와 순식간에 채 가버릴 지라도,
그 한 방울의 이슬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밤이 새도록 수고로움이
나의 잠자는 혼을 깨워 흔들어 버렸다.
아침이슬,
이왕이면 풀잎 끝에 매달릴 때 더 아름답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