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낚아채다)
강은 효자를 낳고 충신을 세우고!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입석마을)
강이 보색이면 완전한 겨울이 되고
동색이면 완전한 여름이라는 것은 섬진강을 따라 나서면서 금방 깨달은 이치다.
팔공산과 내동산에서 발원한 북풍이 섬진강으로 휘몰아 쳐 내려와
한 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도망치듯 달아나면서 말랐던 갈대를 휘젓고 떠났을 때,
지난 2월의 강물은 완전한 파란색이었고 갈대는 완벽한 황색이었다.
둘은 같이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보색이었지만
섬진강은 그것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내는 기술을 지녔었다.
7월이다.
예년 같으면 장마로 하늘이 뚫리고 땅이 녹아 내려앉을 시기지만
마른천둥으로 하늘만 울고 앉았을 뿐 비는 그다지 내리지 않는다.
섬진강은 완벽한 초록으로 바뀌었다.
강물도, 갈대도 누가 강물인지 누가 갈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동색이다.
나는 아직도 순창에 들어 와서 발걸음을 그다지 많이 떼지 못하고 있다.
순창은 섬진강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거의 생소한 고장이었다.
그러나 섬진강이 휘감아 돌아가는 굽이굽이 길들이 나를 붙잡고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나지막한 골짜기 마을마다 나를 잡아끄는 얘기들이 숨 쉬고 있다.
강 옆에 작은 산만한 바위에 새겨진 마을표지석이 입석마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강에서 약 1킬로미터 남짓 산길을 타고 올라가면
밑에서는 도저히 동네가 있을 법 같아 보이지 않는 곳에
마을이 산비탈에 얌전히 걸터앉아 있다.
(시간이 멈춰선 마을 입석)
입석마을은 세월의 잔상이 서려있는 곳이다.
아니 시간이 멈춰선 곳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개 짓는 소리 외에는 인기척이라고는 들을 수 없다.
예전에는 이곳에서도 아이들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을 터...
마을표지석 옆에는 폐허와 같은 누각이 강을 등지고 서 있다.
자칫 했으면 무심코 넘어가 버렸을 만큼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외로운 모습이다.
박씨효자 정려각(旌閭閣)이다.
세월의 짓눌림으로 정려각은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박태구, 박만동, 박태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정려각은
오늘날 어디에서 효행을 기대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주는 듯하다.
박태구는 일찍이 어머님을 여의고 그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고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조섭하고 간호하였으며
단을 만들어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드리워
삼일이나 명을 연장시켰을 만큼 효자였다.
이들에게 정려를 내리는 왕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 인조 3년 1625년의 일이다.
정려각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외곽을 둘러싼 담벼락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무너져 내렸고
수년 동안 무성하게 자라난 잡목과 잡초들이 세상을 향하여 항변하는 듯하였다.
“오늘날 이 세상 어디에 효가 있는가?”
연거푸 두 번 찾은 정려각 앞에 서서 세 분의 효자들을 생각하자니
양심의 가책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가늘게 내리는 장맛비를 맨몸으로 맞으며 강을 따라 다시 나섰다.
이 길을 따라 박태구는 부모님의 병구완을 위해 동분서주 하지 않았을까?
섬진강에 뛰노는 피라미라도 잡기 위해서 물속을 첨벙거리며
미친 듯 헤매지 않았을까?
손가락을 자를 정도였다면,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단을 만들어 빌었을 정도라면
그것쯤은 나의 피상적인 상식에서 나온 천박하고 형식적인 효 일 뿐이라!
목숨이라도 바칠 요량이었을 그들이었으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마치 자신의 과오나 죄 때문으로 돌리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걷자니 바로 옆에 흐르는 강도 보이지 않고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섬진강이 낳은 효의 상징, 박씨효자정려각)
효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충신이 있는 법,
효와 충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근원이 같아 같은 줄기에서 샘솟는 듯한
생수와 같지 않은가?
양사형은 1547년에 출생하여 문과급제로 영광군수,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크게 공을 세운 바 있어 선무공신에 봉해졌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승정원, 도승지에 봉해졌다.
그가 구미에서 이곳으로 분가하여 살면서 영하정을 지었고
그 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그 이름이 어은정(漁隱亭)으로 바뀌었다.
그 忠의 얼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어은정이다.
채 오리도 되지 않은 곳에 마주선 듯이 서 있는 박씨효자 정려각과 어은정,
그러나 그들은 풍채도, 위용도, 자랑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효행과 충성을 기억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조차
구차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오로지 말없이 흐르는 섬진강만이 그들이 효행과 충성심을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까?
섬진강,
도도한 흐름도 없고, 위용과 풍채도 없지만,
뼛속까지 살아 넘치는 너의 강직함과 고난의 세월을 통해
효자를 낳고 충신을 세우는 고귀한 일을 행하였다.
박씨효자 정려각이여, 어은정이여!
비록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지라도 슬퍼하지 말라.
세상이 그대들의 효행과 충성심을 알아주지 못할지라도 서러워 마라.
세상 그 무엇보다 뚜렷한 섬진강 물결위에 그대의 얼을 새겨놓았나니,
섬진강이 이 땅에 흐르는 한, 그대들의 얼은 만대까지 전해지리니.....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