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나니
(구례군 오미 ~ 송정)
터질 듯 하는 가슴이 있다면 이는 바다로 가져가야 한다.
철썩이는 바다, 바위를 깨고도 남을 그 앞뒤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어 보이는 파도에 던져야 한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들썩이는 어깨 울음으로, 가슴으로 울어야 한다면
이는 강으로 가져가야 한다.
세상의 온갖 때를 씻어 버리는 정화수 같은 강물에 내 던지고 씻겨야 한다.
문드러지고 오랜 세월 동안 벙어리로 살아왔던 가슴이 있다면
이는 산으로 가져가야 한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리듯 나를 그 얼척없는 바람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바다는 많아야 한 철에 한 번,
그렇지 않으면 일 년에 한 번 정도 가야 환영받을 수 있다.
매일 바라보는 바다는 공허한 마음만 부추길 따름이다.
강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제격이다.
지난번에 받았던 감동과 메시지가 내 속에서 소화되고 음미되고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산은 시와 때는 물론 대상을 가리지 않는 가슴을 가졌다.
나무와 바위와 구름과 태양으로부터 늘 힘을 받아서인지 모른다.
그에게 다가오는 그 어떤 형태의 모습도 그는 수용성을 가졌다.
지리산 자락을 돌아다닌 지 꼭 일 년, 그를 알고 나를 알아 갈 즈음의 시간이 지났다.
지난 해 설날을 보내고 평사리들판을 가로질러 대축마을 뒷산을 감싸 안고 돌았을 때
미동마을 앞을 휘감아 돌아가는 섬진강이 태양에 그을려 검게 타고 있었다.
앞으로 일 년이 지나야 다시 섬진강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후 꼭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는 산에 기대어 살았다 할 만큼 산과 가까워졌다.
아침마다 내가 시간을 보낸 곳도 산자락이었다.
내 첫 호흡이 뿌려지고 내 첫 음성이 울려 나는 곳도 산자락이었다.
나의 첫 발걸음, 첫 기도가 시작되는 곳도 산길의 작은 오솔길이었다.
섬진강에서 보낸 일 년은 나와 섬진강이 하나 되어 손잡고 걸은 동행의 시간이었고
섬진강이 나의 친구가 되고 내가 섬진강의 친구가 되었던 시간이었다.
지리산과 보낸 일 년은 나와 호흡을 같이한 시간이었다.
내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고 무딘 내 감성을 다듬어 주었고
어디로 발을 떼어야 할지 모르는 내게 선명한 음성으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일 년 전 대축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감전시키고 냉가슴이 뜨거운 가슴 되게 한 것은 비발디였다.
한 번씩 라디오에서 듣는 비발디의 <사계>는 그 대중성으로 인하여 늘 익숙해 져 있는 멜로디다.
하지만 그날 평사리 들판에서 들은 <겨울>은 겨울을 겨울답게 만들었고
봄을 잉태시키고 계절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창조적 에너지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사계 중에서도 <겨울>을 무척 좋아했고
<겨울>의 멜로디에서는 나는 늘 용광로와도 같은 열기를 느꼈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온 세상의 기운이 땅에 바짝 엎드려 있다.
겨울에 내리는 비는 마른 대지와 그 위에 흩날리는 나뭇잎은 물론
건조해진 일상에 충분한 영양분을 제공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떨어진 낙엽 위에 시 한 구절씩이 씌어져 있어 보인다.
숲은 한권의 시집이 되어 있었다.
구례군 토지면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쇼팽이 동행 해 주었다.
그는 간밤에 낙엽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건반으로 옮겨 놓았는가 보다.
쇼팽을 들으면 꼭 가는 비를 맞고 강가를 걷는 느낌이다.
잔잔하면서도 촉촉이 땅으로 스며드는 빗물처럼 내 속을 파고든다.
그와 나는 일체감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의 야상곡은 가랑비로 내리다가 때로는 폭우로 창을 때리기를 반복한다.
올 한 해는 쇼팽과 아무래도 친구가 될 것 같다.
유이주로 대표되는 오미마을을 지나 파도마을이 내 발 아래 비에 젖어 있다.
옅은 안개가 온 산과 마을을 덮고 있어서 가시거리가 일 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착시 현상이 생기고 나무와 산과 마을들이 몽환적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때로는 구름이나 안개가 낀 날씨에는 멀리 있던 산이 가까이 다가와 서 있을 때가 있다.
하늘이 파랗고 공기가 맑아 더 선명하게 보일 것 같은 날씨에는
오히려 산은 저 멀리 한 걸음 뒤로 물러 서 있을 때도 있다.
차라리 지금까지 내가 본 경험으로는 안개가 살푼 걸쳐 있는 산등성이는
그 능선이 더 선명하고 손으로 잡을 듯 하다는 것을 매 번 느낀다.
세상이 투명해 졌다고 하지만 더 혼탁해져 가는 현실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온갖 통신이 발달하여 세상일들이 명경처럼 볼 수 있지만
세상은 더 어두워져 가고 일탈이 심해져 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차라리 파발이나 편지로 세상 소식이 전달되고 전파될 때가 더 맑고
더 가까이에서 보는 것과 같았던 이치와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내린 비로 산 속 오솔길에 떨어져 있는 낙엽이 붉게 변하였다.
한껏 물을 들여 마셨는가 보다.
두터운 등산화 밑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만큼 길에 탄력이 생겨 산길을 오르는 느낌도 경쾌하다.
오늘 걷는 길은 노고단의 동생뻘 정도 되는 왕시루봉 아래 산자락이다.
왕시루봉 발아래는 섬진강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전라도 백운산이다.
두 산은 거의 겹쳐져 있고 섬진강은 이 두 산 사이를 지나 남해로 흐른다.
산길을 따라 오르막이 계속되고 숨은 헐떡거린다.
옅은 안개사이로 연한 곡선이 발아래에 밟히는 느낌이 들자
잔잔한 물 흐르는 소리가 울려 솟구쳐 오른다.
왕시루봉과 백운산이 하나의 공명장치가 되고 안개가 그 소리를 정화시켜
작은 흐름도 선명하게 잡아내는 역할을 한 듯하다.
구름은 거의 정체되어 있지만 약간씩 미동하는 그 형국에 따라
산 능선이 드러났다 덮이고 곡선의 섬진강도 그 모습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강물 소리는 그를수록 더 선명하고 명쾌하여 공명된다.
마치 차 속에서 들었던 그 쇼팽의 소나타 음률처럼 사랑스럽게 산 계곡을 타고 흐르고
내가 걷는 작은 오솔길에 건반을 만들어 내 발걸음을 뗄 때마다 선율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안개만 있었다면 자칫 보지 못할 섬진강을
자연이 만들어 낸 그 완벽한 공명 장치로 인하여
깊은 산 속 왕시루봉 아래에서 땀을 식히며 듣는 행복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다.
섬진강은 소리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주얼이 강조되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 만큼 믿음도 식어져 가는 세상이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던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결국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극히 제한된 부분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갖는 의미는 보이는 것들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보이지 않아 더 신비롭고 더 우렁찬 사운드를 발하는 섬진강은
분명 왕시루봉과 백운산에 소리가 울려 아름다운 선율로 내게 다가 왔다.
안개로 이하여 더 가까이 다가왔던 백운산, 그 유연한 곡선미,
안개로 인하여 더 선명하게 들려왔던 섬진강 사운드,
이들은 보이지 않음으로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증인이다.
보이는 것에 비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덜 대접받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내 귀를 때리는 소리가 있다.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으니…….”
빗속의 송정마을이 섬진강가에 누워 쇼팽의 야상곡을 안개 속에서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