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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서 온 편지 (36)
더페스티벌    2011-09-26 죄회수 3,311 추천수 1 덧글수 2  인쇄       스크랩     신고

 

(향교길에서 만난 할머니들, 아침부터 정담을 나누시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시네요)


지난 주간은 냉탕과 온탕을 매일 들락거렸던 느낌입니다.

소위 "블랙아웃" 지경까지 치닫게 하더니

불과 며칠도 안 되어 "이렇게 되면 가을 실종사건 일어나는 것 아니야?"

할 정도로 기온의 변화가 심하게 일어났었습니다.


그런 덕분이었는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빛나 보이는 계절은 아마 없지 싶습니다.

빛에 반사되는 코스모스, 들판의 곡식들,

얼마나 투명하고 원색적이던지 세상을 매혹시키고 남음이 있습니다.


이런 황금 같은 시간도 앞으로 길어야 한 달

이 시간을 놓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올해의 황금계절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마시길....


이번 호에는 타임머신 타고 돌아보고 싶은 향교길과

한국인의 서정성 형성에 깊이 관여하신 노래시의 대명사 정두수선생의

얘기를 준비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계시는 공자님들입니다. 석전대제에 한껏 차려입으시고 나오셨네요)

향교길에서 공자를 만나고 싶다.

가을이 되면 듣고 싶은 소리가 있습니다.

찹쌀떡~사려~ 메밀무~욱~

몇 년 전 어느 가을밤에 청아하게 들렸던 이 소리는 하나의 예술이었습니다.

떡 파는 소리가 저처럼 청아할 수 있을까?

가을바람을 타고 퉁소음처럼 공명되어 동네에 잔잔히 내려앉았습니다.

떡을 파는 것이 아니라 멋을 팔고 삶을 파는 소리였습니다.


가을이 되면 또 하나 듣고 싶은 소리가 있습니다.

시조낭독소리입니다.

옛날, 할아버지들의 사랑방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소리였습니다.


구슬픈 고음으로 치닫다가 콘트라베이스보다 더 나지막하게 깔리는 저음,

새끼 꼬는 소리와 함께 가을밤을 수놓았습니다.

 

인류 문명은 도시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고고학의 발달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기원전 3천년 전에

이미 수만 명의 집단거주지였던 도시가 발견되기도 했다는 자료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5천년이 지난 지금,

오늘의 우리와 그 때의 그 고대인들과의 생각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어제가 옛날 이라고 하지만 수 천 년 전의 인물들과

오늘 날 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나와는 무엇이 다른가?


이 물음에 몸서리가 쳐 집니다.



시골의 읍내에서 살아온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읍내는 시골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도시라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지점입니다.


하동읍내의 경우 크게 주택지와 시장이 중심이 된 상가,

그리고 군청과 경찰서 등 관공서 타운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주택지는 주로 고지대 산자락에 붙어 있어 멀리서 보면 쥘부채처럼

쫙 펴져 멀리서도 그 모형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읍내 가운데 정 중앙에는 재래시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읍내를 지켜오고 있는 일종의 보안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읍내의 가장자리 북쪽 끝에는 하동향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만큼이나 향교는 두터운 옷을 입고 무겁게 깔려 있습니다.



향교길을 가면 왠지 가을이 더 깊이 다가올 것 같아

아침저녁으로 배회를 하곤 했습니다.


풀 먹인 하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어르신들이 걸을 때

사각사각 옷 깃 스치는 소리와 독경소리를 듣고 싶은 욕심이 났습니다.


마침 추계석전대제 준비로 집사 한 분이

그날 제례준비에 분주하게 다니시는 모습이 대문사이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읍내에서 도시의 역사를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총천년색 네온사인, 시멘트 포장, 국적도 없어 보이는 슬래브지붕,

그래도 좀 오래되어 세월의 때가 묻어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벽돌집,

가뭄에 콩 나듯이 일제식 건물의 잔재가 있기는 하나

폐허가 되어 건물의 기능이 끝난 지 오래되어 시간의 잔재 뿐 입니다.


그나마 읍내에서 세월의 때가 묻은 곳은 향교길입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무대가 되었던 피렌체,

두오모성당이 굳이 없더라도 가랑이를 벌리면 두발로 닿을 법하게 좁은 골목길,

수백 년이 넘어 고색창연한 건물과 무쇠처럼 생긴 돌을 다듬어 바닥에 박아 놓은 포장도로를

중세 시절의 기사가 말을 타고 막 나타날 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역사와 문명의 출발점 로마, 성채와 같은 오르비에또,

군사도시였던 리옹, 깊은 계곡에 자리 잡은 멘드리시오 ....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역사와의 대화, 문명과의 교감을 하지 않은 도시가 없었습니다.


읍내 향교길에서 공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문명과 도시의 역사를 듣고 싶습니다.

역사의 무게, 곳곳에 진하게 배여 있는 사람의 흔적들,

역사와 대화하고 문명과 교우할 수 있는 읍내가 그립습니다.

(정두수 선생의 노래시비가 있는 배다리공원입니다. 선생의 체취가 물씬풍기는 곳입니다)

 

가요계의 대부, 한류 제1호 ..... 정두수를 말하다!

대한민국 사나이 치고 이 노래 모르는 사람은 아마 간첩일 것입니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 리 타향 멀리 가더니,

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굽이굽이 절묘하게 꺾어지는 나훈아식의 가창법이 더욱 돋보였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가 나훈아를 나훈아되게 한 노래 아닌가요?


제가 어렸을적에도 나훈아와 남진은 라이벌중의 라이벌이요, 스타중의 스타였는데,

요즘 가수들의 인기는 사실 이 분들의 인기에 비하면 인기도 아니지요.


동네 골목길을 가다가도 남진의 <님과 함께>가 들려오거나

나훈아의 <물레방아>가 들리면 집으로 달려가 라디오를 켜서 노래를 듣고

다시 놀러 나왔던 추억도 있었는데

어렸을 적엔 그래도 힘 있어 보이는 남진을 더 좋아했었던 기억입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요새 이 노래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또 한 번의 빛을 보고 있더군요.

정말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말도 안 되고 의미도 전혀 통하지 않는 노래를 만들어

그것도 노래라고 불러대는 가수들이 있기는 합니다 만,

그래도 옛 노래를 다시 시대적 감각에 맞춰 각색하여 빛을 보게 된 것은

참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남진의 또 다른 대표작은 "가슴 아프게"가 아닐까요?

한국의 엘비스프레슬리를 연상할 수 있던 남진이가

이런 노래를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지금도 흰 색 구두와 바지, 눈이 부시도록 하얀 자켓으로 멋지게 차려 입은 남진이가

<님과 함께> 그리고 <가슴 아프게>를 부르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불세출의 가수인 나훈아와 남진을 있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인지 아시는지요?


하동사람, 바로 정두수입니다.

시인으로 잘 알려졌으며 교과서에도 그 분의 시가 수록되었던 정공채선생의 동생인 정두수선생은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출생하셔서 유년시절을 하동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노래시에는 하동에 대한 서정과 망향의 정서가 절절이 배여 있습니다.


<물레방아 도는데>와 <가슴 아프게>는 사실 연애적 노래시로 알려 져 있으나

진주교육대학교 송희복 교수님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일제 말 학병으로 끌려가는 막내삼촌이 집 앞 징검다리를 건너다

안타깝게 뒤돌아보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정두수선생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순간 그동안 멋모르고 불렀던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어디 이참에 <가슴 아프게>를 한 번 뽑아 보시겠습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가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 메여 운다.

(성평리의 끝이 보이지 않는 코스모스길.... 이 길로 올라가면 물레방아와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이 노래 말고도 정두수선생의 노래가사 중 고향 하동의 서정적인 배경을 둔 작품이

그야말로 수두룩 하는데,

<시오리 솔 밭길>, <목화아가씨>, <도라지 고갯길>, <감나무골>, <고향역> 등등

그 수가 하도 많아 셀 수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렇듯 정두수선생 노래시는 약 3천여 편이 된다고 합니다.

이들 노랫말들이 대한민국 일류 가수들의 입을 통해 불려졌고

한국인의 서정적 DNA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던 분입니다.

아마 오늘 밤 동료들과 친구들과 어울려 부르시는 노래 한곡쯤은

제가 살고 있는 하동을 애송하는 노래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할 것입니다.


실제 정두수선생의 고향 성평리 마을에는 아직도 돌담길이 있어

걸어갈 때마다 선생께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실 듯한 감흥을 느낄 수 있으며,

막내 삼촌이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뒤돌아보았던 그 징검다리는

다리가 놓여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지만 시냇물에 투영되는 징검다리는 서럽게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물레방아는 이미 바람이 되고 물이 되어 흘러가 버렸지만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새롭게 물레방아를 만들어 정두수선생의 망향의 애틋함을

함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동사람, 한국인 정서의 대변자, 한류 1호, 대한민국 가요의 산증인이자 대부, 노래시의 창시자....

정두수 선생님에 대한 별칭은 셀 수 없어 보입니다.

정두수 선생의 노래시는 노래를 노래가 아닌 삶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물레방아, 코스모스, 솔밭 길, 징검다리, 돌담길....

한국인이라면 가슴에 꼬~옥 담아 놓았을 법한 이 시어들이 우리들 속에 살아 있게 된 것은

선생의 하동터치, 하동칼라, 하동다움이 더해졌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선생의 체취가 풍겨나는 성평리로 오셔서 한국 근대적 정서를 한껏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

태그  하동편지,하동 조문환,섬진강,하동향교길,성평리,코스모스,정두수,배다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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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지니   2011-09-27 16:50 수정삭제답글  신고
우와 코스모스 길.. 가 보고싶네요. 지금 막 뛰어 들고 싶어여.
piggy   2011-09-26 09:52 수정삭제답글  신고
아~ 그렇군요. 하동사람 정두수 선생님의 노래시에, 남진 나훈아의 노래 한 자락 깔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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