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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서 온 편지 (37)
더페스티벌    2011-10-04 죄회수 2,759 추천수 1 덧글수 2  인쇄       스크랩     신고

(세상에서 가장 살고싶은 느낌의 동네 양보면 원박마을, 저 두 자매처럼 손 잡고 느리게 이 길 걸어보세요)


가을다운 가을이 되기 시작한지 불과 보름,


이 가을을 제대로 보내고 있는 거야?

내가 다짐했던 그 가을 보내기....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벌써 이런 자문을 했습니다.


이 가을에는 더 고독해 지고,

더 나를 생각해 보고,

더 성찰 해 보고 싶습니다.

다른 부분들은 말할 것 없지만

배려와 포용

이런 것들이 저 속에서 메말라 버렸다는 자책도 합니다.

그 어느 계절보다 성찰하기 좋은 나날들,

이 가을을 더 사랑해 보렵니다.


이번 주에는 하늘아래 첫동네, 대성골 왕성분교의 운동회이야기,

그리고 저의 행복했던 형제봉길을 소개해 드립니다.

 

(내가 일등이다.... 추억의 "아빠와 엄마 손 잡고 달리기".... 어떠세요 기억나세요?)

*운동회 사진은 저의 동료 변거황씨가 제공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하늘아래 첫 동네 지리산 왕성분교의 가을 운동회



가을이 되면 귓전에 쟁쟁 울리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짤그락 짤그락” 엿장수 소리

“삐삐 뿌뿌” 장난감 나팔소리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라데츠키 행진곡 그리고 호각소리!


“이겨라 이겨라 우리청군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우리백군 이겨라!”


두 팔 원을 크게 그리고 팔과 발로 절묘하게 박자를 맞추며

박수를 유도하면서 응원을 유도하는 응원단장의 쉰 소리!


에! 오날은~~ 우리 궁민학교 운동횝니다!

오날 운동회를 통하야~~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은 꿈을 꾸는~

우리 궁민학교 어린이 되길 바랍니다~~~


메아리가 되어 온 교정을 울려퍼졌던 교장선생님 훈시말씀


일찍 내린 가을 서리가 채 녹기전부터 산골동네 어른들은

명당자리를 잡을 요량으로 학교로 향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혹 신발을 잃을지 몰라 아예 맨발로 찬 서리를 밟으며

종종걸음으로 이미 학교를 떠난 후였습니다.


올해는 빨간 코스모스가 더 많이 피었으니 분명 청군이 이길거야...

아냐, 백군이야!


이미 경쟁은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 할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운동회가 있기 한 달 전부터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운동회 준비에 모든 것을 다 바쳤지요.


릴레이 선수를 뽑고, 덤블린 체조팀을 만들고, 곤봉이다 기마전이다...

곤봉체조 배우느라 저는 뒷통수를 곤봉에 많이 맞기도 했었습니다.


달리기를 제법 잘하였던 저는 릴레이선수에 매번 뽑혔고

항상 피날레를 장식했던 전학년 청백 릴레이 달리기 때에는

온통 심장이 터질 듯 했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 저렇게 터질 듯한 응원소리를 뚫고 내가 달려야 한다!

방망이가 온 심장을 둥둥 때리는 듯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기다려지는 시간은 점심시간,

지금은 너무나 흔한 계란, 멸치, 나물

그리고 햅쌀로 지은 찰밥은 약방의 감초와도 같았습니다.


점심바구니가 터지자마자 온 동네 식구들이 모여 펼치는 점심도시락은

이보다 더 할 수 없었던 행복바이러스, 해피 런치였습니다.


이윽고 서산에 해가 걸리자

마지막 총성이 그치고 드디어 총점이 발표 찰라,

전교생은 물론이고 그 때까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던 부모님들까지도

가슴이 조마조마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점수는 백군 998점, 청군 997점 1점 차로 백군이 이겼습니다!”


온 교정은 환호와 탄식이 울려나왔으나 그것도 잠시 모두가 승리선수가 되어

그날 상품으로 딴 노트와 연필을 받아들고

으기양양 국가대표선수라도 된 듯 동네로 개선행진 했었습니다.


아! 이 추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리산자락, 하늘아래 첫 동네 대성골에 자리잡은 왕성분교,

점점 줄어드는 아이들 때문에 분교로 전락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운동회라는 이름 대신에 ‘아이들 가을잔치’로 행사를 치르지만

아이들 잔치 보다는 동네 어른들의 옛 추억잔치가 된 느낌입니다.


이미 아이들과 어른들은 동심의 세계로 푹 빠져들었고

귀농하신 새마을 지도자님의 댄스 솜씨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때 어김없이 운동회 구경을 가곤 했었지만

왠지 어릴적 그 때 그 감흥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요즘에도 길을 가다가 혹 운동회가 열리는 학교를 지날 때면

저의 가을운동회를 추억하곤 합니다.

이 가을에는 작은 시골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동심을 자극하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어 보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울 수 없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들국화가 퍼레이드를 펼칩니다)


형제봉 가늘 길

 

산을 오른다는 것은

산 넘어 또 따른 산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함이요,

내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을 느끼기 위함이며,

살아오면서 아웅다웅 거렸던 것들이 하찮은 것들임을 깨닫기 위함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정복하기 위함이 아니요, 대자연 앞에 나의 무릎을 꿇기 위함이요,

누군가가 오래전에 이 산하를 창조하셨음을 기억하기 위함이며,

아래를 내려다보기 위함이 아니라 더 멀리 보기 위함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전력질주하면서 달려왔던 시간들을 내려놓고 천천히 걸어보기 위함이요,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갔던 고독한 또 한 사람이 있었음을 발견하기 위함이며,

바위틈에서 진한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야생화를 통하여

삶의 고귀함을 배우기 위함이다.



아침바람을 가르며 형제봉엘 올랐습니다.


섬진강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봉우리,

잘록한 허리를 가지고 오백리 길을 쉼 없이 내려와 평사리 백사장에서 쉬어가는

섬진강의 수고가 손에 잡힐 듯 합니다.


저 가는 허리로 5백리 길을 쉼 없이 달려왔을 것이다!



어쩌면 형제봉을 오르는 것은 잘록한 허리를 가진 섬진강을 보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형제봉은 활공장이 있어 차량으로도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황금들녘으로 변한 평사리들판과 섬진강을 보기 위해 차량으로 올랐습니다.


지난여름, 두 번의 수해로 곳곳이 파 헤쳐져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손을 댄 이기적인 곳이었으며

자연 그대로 두었던 곳은 그 어디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산허리를 휘감아 돌자 조금씩 칼라가 달라지는 단풍나무들,

하늘거리는 갈대가 가을 정취를 한껏 북돋아 주었습니다.


8부 능선에 이르자 길 양쪽에 하얀 들국화들이 도열하듯

수백미터를 줄 지어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도리가 아니기에

차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습니다.


하잘 것 없는 이방인 한 사람을 위해 이들은 이렇게 온 몸을 다하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갑자스런 복통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아내를

억지로라도 동행시키지 못했던 것이 내내 후회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형제봉 야생화들의 도열과 퍼레이드,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디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가 이보다 더 한 개선식을 거행했겠는가?



(형제봉은 세계적 수준의 활공장입니다. 그 풍만함과 여유로움이 이방인의 마음을 녹여줍니다)


활공장은 언뜻 보기에는 외국의 목장과도 같아 보입니다.


둥근 언덕배기,

산 정상에 왔다는 실감이 들지 않은 풍만함과 부드러움이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여기서 약 30여분을 걸어 남쪽으로 향하면 바로 형제봉, 해발 1117미터입니다.

이 봉우리에서 수백미터를 더 걸으면 聖帝峰, 해발 1115미터입니다.


형제봉을 성제봉이라 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성제란 聖帝이기도 하나 兄弟의 경상도식 발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 같은 높이, 꼭 같은 생김생김의 봉우리가 불과 지척에 서 있으면서

남해안을 조망하고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의좋은 형제가 부럽습니다.

태고부터 이들은 이렇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북풍한설과 무리서리와 천둥과 번개와 온 산을 날려 보낼 듯한 폭풍을

서로 보듬고 격려하면서 말입니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치솟음으로 생겨난 봉우리 형제봉,

어쩌면 여기부터 백두대간은 시작되었고 백두대간의 뿌리이자 발원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섬진강과 남해바다를 자양분으로 그 넉넉한 평사리 들판을 딛고 선 형제봉은

이 나라 대한민국의 최남단 중심에 서서

소백산으로, 설악산으로, 백두산으로 이어질 정기를

이 세상 끝날 까지 실어 나를 것입니다.


단풍이 온 천하를 물들이고 그리고 찬 서리가 그 이파리를 다 난린 후

빼빼마른 섬진강과 앙상한 가지만 남긴 형제봉을 만나러

또 다시 형제봉을 찾고 싶습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


태그  하동 조문환, 가을운동회, 원박마을, 형제봉, 성제봉, 활공장, 섬진강,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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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   2011-10-08 10:36 수정삭제답글  신고
활공장 형제봉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집니다.
Slugger   2011-10-04 11:57 수정삭제답글  신고
학교운동회 계절이군요. 나는 항상 백군이었는데.. 질 때가 더 많았어여.. 별 기억이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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