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에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입산하러 가던 길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를 창건하여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고, 태자는 이 곳에 석글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석굴사원 터.
흔치 않은 북향(北向)사찰이다. 사적 제317호.
하늘재[寒喧嶺]·계립재[鷄立嶺]·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조성된 석굴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발굴 당시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석등, 당간지주 등 중요한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삼년김당개개와)’, ‘彌勒堂(미륵당)’, ‘彌勒堂寺(미륵당사)’, ‘院主(원주)’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미륵을 모시는 사찰이자 원(院)을 겸하는 사찰이며, 1192년(고려 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7월 28일자로 ‘중원 미륵리사지’에서 ‘충주 미륵대원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정식 사적 명칭은 충주 미륵대원지(忠州 彌勒大院址)로 되어있지만 중원(中原)이란 이름을 붙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이 치열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특히 ‘미륵대원’이라고 한 것은 동쪽에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인데, 말을 묶어 둔 마방시설, 여행자 숙소 등 역원의 건물터도 함께 발굴되어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합친 고려 초기의 중요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은 보믈 제95호로 높이 6m 고려시대 지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