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이인숙)은 3월 26일(화)부터 5월 26일(일)까지 "온조, 서울역사를 열다-백제건국과 왕도한성"을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왕도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수도 서울의 역사성을 알리고, 온조(溫祚)가 서기전 18년에 세웠다는 백제를 특별기획전을 통해 학습시키겠다는 뜻이다.
▲ 풍납토성 성벽절개 조사현장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내려온 온조(溫祚)가 서기전 18년에 한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서 세운 나라로서, 온조왕 13년(서기전 6년)에 이미 경기도지역을 모두 장악할 정도로 급성장했으며,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3세기경에 편찬된 역사서 삼국지에는 삼한(三韓)의 하나인 마한이 50여개의 작은 나라로 이루어졌으며 그중 하나가 백제국(伯濟國)이라고 적혀있다.
이에 한국 역사학계는 삼국사기에 쓰여진 대로 백제가 기원 무렵에 나라를 세우고 급성장했다는 학설과 삼국지 기록에 따라 3세기 중엽까지도 마한에 속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는 학설로 나뉜 상태이다.
유적유물을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계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1997년부터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풍납토성 발굴조사를 통해 풍납토성 성벽이 이른바 판축공법(版築工法)과 부엽공법(敷葉工法)이라고 하는 매우 발달한 토목과학기술로 쌓은 대규모 성벽이며 궁궐건물과 포장도로, 사당, 연못, 우물 등을 갖춘 왕성이라는 사실은 밝혀냈으나, 토성을 언제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 상태이다.
풍납토성 발굴조사단은 대체로 백제가 풍납토성을 기원 무렵에 처음 쌓았으며 늦어도 2세기에는 지금과 같은 크기였다고 판단하였지만, 백제고고학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백제가 풍납토성을 3세기 이후에 처음 쌓기 시작했으며 4-5세기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크기로 되었다고 믿는다.
백제는 마한 50여국을 모두 병합하며 성장한 고대국가이다. 그래서 흔히 백제(百濟)의 백(百)을 백제에 흡수된 많은 집, 많은 세력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따라 특별전에서는 백제와 경쟁하다가 스러진 마한의 여러 작은 나라들 가운데 특히 한강유역에 위치했던 나라들의 흔적을 유적유물로 소개하고 이들이 백제에 병합된 과정을 설명한다.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마한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고국(臣濆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등 한강유역과 지금의 경기지역에 위치했던 나라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중 백제국이 성장하며 이웃 나라들을 병합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고고학계에서는 백제국에 병합된 이웃세력의 흔적으로서 근래 수년간 발굴 되고 있는 남양주 장현리, 파주 와동리 갈현리, 인천 중산동 운남동 운서동, 김포 양촌, 가평 대성리 등 1~3세기의 주거지 무덤 환호 등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 풍납토성내부 환호출토 경질무문토기 ▲ 가락동 2호분 출토 검은간토기
백제는 위례성에서 건국했다가 곧 왕성의 규모를 확장하면서 이름을 한성(漢城)으로 바꾸었다. 현재 역사학계의 통설은 백제의 왕도 한성이 북성(北城)과 남성(南城) 2개의 성으로 이루어졌으며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이라는 것이다. 금번 특별전에서는 위례성과 한성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았고, 죽은 뒤 어디에 묻혔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한성에서 즉위한 왕은 모두 21명이며, 이밖에 을음(乙音), 해루(解婁), 진회(眞會), 훈해(訓解), 혈례(蝶禮), 곤지(昆支) 등 수많은 왕족과 지배계층이 태어나고 자란 것으로 알려진다.
한성도읍기에 백제사람들은 주로 풍납토성 안팎의 움집에서 살았는데, 평면형태는 철(凸)자형, 여(呂)자형, 육각형 등 다양했으며, 이밖에 원두막처럼 생긴 고상가옥도 있었다.
백제사람들은 평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안팎에서 살았지만, 죽은 뒤에는 그 남쪽 구릉과 하천변에 묻혔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평지처럼 변했으나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등지에 형성되었던 야트막한 구릉은 일종의 백제국가묘지로서 백제왕을 비롯한 지배층과 일반서민까지 권역을 형성하며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