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팬덤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팬덤(FANDOM)은 유령을 의미하는 팬덤(PHANDOM)과 발음이 비슷하지만, 팬(Fan)으로 이루어지는 문화세력 집단을 의미한다.
팬(Fan)의 시작은 스포츠이다. 19세기 후반 이후에 스포츠는 대중적인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시에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스포츠는 "하는 스포츠"에서 "보는 스포츠"로 바뀌었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으로 확산되던 "미디어 스포츠"가 대중여가 활동으로 자리잡으면서 매스미디어는 팬(Fan)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팬(fan)은 패너틱(fanatic)의 줄임말로 교회에 속해 있거나 헌신적인 봉사자나 열성가를 뜻한다. 당시의 팬은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스포츠 스타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뜻했다. 스타와 팬은 일대 다수의 일방적인 관계였다.
매스미디어가 앞 다투어 팬에 관한 이야기를 들먹이자, 팬(Fan)의 의미는 급속히 확장되어갔다. 팬은 스포츠만이 아니라 연예, 오락, 정치, 브랜드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팬(fan)에 세력범위를 의미하는 접미어 돔(dom)이 결합되면서 팬덤(fandom)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팬덤은 어떤 특정한 스포츠나 연예인, 음악이나 배우, 영화, 소설, 만화 등 대중적인 특정 캐릭터나 분야에 몰입하여 편향된 기호를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국내에서 팬덤은 "오빠"를 외치며 열광하는 10대의 소녀들, 그들의 함성과 비명, 각종 플래카드, 응원 도구들을 연상시킨다. 국내에서 팬덤은 청소년 문제, 사회병리현상, 스타열병, 광신도 집단 등으로 인식되었다. 매스미디어는 팬덤의 폐쇄적이고 편향적인 성향으로 인해 팬덤을 사회, 병리학적인 현상, 저급한 하위문화로 다루었다. 언론은 "너무 스타에 빠지면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타인을 흉내내고 타인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결국 상업문화의 노예가 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1980년대는 가수 조용필의 전성기였다. 매스미디어는 조용필이 <비련>의 첫 음절인 "기도하는…"을 노래하기 시작되면 "꺄악"하고 소리치던 단발머리 광신도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소녀팬들을 지칭하던 "오빠부대"는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여 국내 대중가요 팬덤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오빠부대는 특정 남자 연예인을 좋아하는 여성팬들로 이루어진 팬덤을 지칭하게 되었다. 오빠부대 시절의 스타와 팬의 관계는 매우 단순하고 수동적이었다.
▲ 조용필 팬클럽 홈페이지 조용필 데뷰 당시 초등학생이던 오빠부대들은 이제 엄마가 되었다. 팬덤도 성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 탄생 |
팬덤은 어떻게 형성되나?
종교에도 광신도가 있지만 팬덤은 광신도로부터 시작된다. 광신도에서 신봉자로 신봉자에서 신도로 파급된다. 디지털 시대는 파급속도가 급속히 빨라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폐인은 스타, 드라마, 온라인 게임, 자신의 취미, 커뮤니티, 일, 기타 등에 대해 극단적으로 심취한 사람을 뜻했다. 원래 폐인은 원래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사람"이다. 스타 광신도들, 신봉자들, 신도들인 폐인이 팬덤인 것이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폐인으로 묘사되던 디지털 시대의 팬덤은 유령처럼 슬그머니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안티팬덤이라는 새로운 문화소비 집단도 생겨났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 세상에서는 팬덤이든 안티팬덤이든 쉽게 집단화될 수 있었다.
전성기의 서태지는 일개 인기 가수가 아닌 한국의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문화 대통령"으로 치부됐다.
이를 시기하던 일군의 대중 문화소비자 집단이 모여 서태지 안티가 생겼다. "서태지 안티"는 서태지 사탄 숭배설, 게이설, 임신설 등을 네트워크로 연결된 새로운 세상 인터넷으로 퍼트렸고, 매스미디어는 서태지가 언론에 비협조적이라는 감정적인 이유로, 사실 확인 없이 사탄숭배설, 게이설, 임신설 등으로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안티팬덤에 저항하던 서태지 팬덤은 종래의 단순하고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서태지 팬덤은 자비를 들여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소포를 해외로 보내 외국의 웹진에 리뷰를 의뢰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자 스타와 팬덤의 관계는 단순 추종자에서 후원자, 새로운 문화 창조자의 관계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익재는 1994년 부터 한국 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미디어, 콘텐츠, 저직권, 대중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네이버에 한국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블로그 //blog.naver.com/skclab 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식재산으로 착한부자 //cafe.naver.com/cproperty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