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활 잘쏘는 민족
우리의 옛 전통 놀이 중에 단연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놀이로 활쏘기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전통의 활쏘기는 이제 민속전통의 역사속으로 점차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전통 활쏘기가 우리 역사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뒤돌아 보고 왜 지켜나가야 하는지 생각해 볼 때다.
활쏘기는 옛 무인들만 익혔던 전투 기술로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네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활과 가까이 지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전통 활쏘기의 유래는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전국의 선사유적에서는 마제석촉이라 하여 화살촉이 곳곳에서 출토되었다. 초기 궁시(弓矢:활과 화살)는 구석기시대말 근동아시아지방 민족에 의해 사용되었고 신석기시대에 사냥을 위해 빠르게 보급되었으며 부족간의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조선의 단궁과 고구려의 맥궁은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우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夷" 자는 대궁(大弓)을 뜻하는 말로 큰 활을 잘쏘는 민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위지 동이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활쏘는 재주가 뛰어나며, 주위사람들이 이들을 두려워하여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다."
중국 송나라때 편찬된 신당서(新唐書:당나라의 正史)에는 "고구려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글읽기와 활쏘기를 병행시켜 국민 전체에 사풍(射風)이 보급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명궁이던 고이왕이 하루 40마리의 사슴과 화살 하나로 두마리의 기러기를 맞히는 솜씨를 지니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백제 비류왕 17년에 궁궐에 사대(射臺)를 만들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백성들과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활쏘기가 행해졌다고 전한다. 중국문헌인 후주서(後周書)에는 백제에서는 활쏘기가 널리 퍼져 향(鄕) 단위에서도 활쏘기가 보편화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삼국시대 활쏘기는 관직 등용에 없어서는 안 될 능력중 하나였다.
신라에서도 788년, 원성왕대에 이르러 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신라의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한 관리선발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활쏘기만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다고 전하고 있어 신라에서 궁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상무(尙武:무예를 숭상함)가 더 중시되어 현종은 문관들에게도 4품이하, 60세 이하인 자는 공무가 없는 날 활을 쏘게 하였고, 선종은 군대는 물론 활을 배우고자 하는 일반인들에게도 궁술을 익히는 활터를 만들어 과녁을 맞히면 상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의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중 활쏘기를 배우는 선비의 모습이 담긴 그림.
조선시대에 와서도 활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정은 끊기지 않았는데 태조 이래 역대 왕들은 활쏘기를 즐기고 이를 장려해 문과 출신의 문신들도 활을 잘 쏘았으며, 임금이 직접 궁술대회를 열기를 즐겨했다. 조선초기를 대표하는 문신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 왕들의 활 사랑에 "활쏘는 일로써 큰일을 삼고 있다."며 활쏘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왕에게 이를 자주 하지 않도록 부탁하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1710∼1784)의 사인삼경도(士人三景圖), 선비들의 시, 서화, 무예를 겨루는 장면을 그렸으며 이중에는 당시 선비들의 활쏘는 장면을 담은 그림도 있다.
활쏘는 장소를 사정(射亭)이라 하는데 활터, 사장, 살터라고도 한다. 사정은 본래 활터에 설치된 정자를 뜻하는데 대회를 진행하거나 사원(射員)들이 모여 쉬는 곳으로서 점차 활터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처음 사정은 관에서 관리하여 선비들이나 관원들이 이용하였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선조는 경복궁에 오운정(五雲亭)이라는 사정을 만들어 누구나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민간에 개방하였다. 이후 활쏘기가 널리 장려되어 서울 도성 내에만 30개의 사정이 생기고 지방에도 많은 민간 사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 활쏘기는 즐기는 선비, 활을 쏘는 사람은 고상한 품격과 평정한 마음을 지녀야하고 동작에 있어서도 절도와
예의를 지켜야했다. 활쏘기는 체력단련과 인격수양에 더 없이 좋은 운동이자 교육방법으로서 장려되었다.
1945년까지 서울내에 40여개의 사정이 있었는데 , 현종과 숙종때에도 궁술을 높이 장려해 활쏘기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 전국적인 풍속을 이루다시피 했다고 전한다. 활쏘기는 일반적으로 음력 3월 경의 청명한 날을 택하여 궁사(弓士)들이 편을 짜서 경기 하였는데 이 때 많은 구경꾼들이 모이고 궁사들이 번갈아 활을 쏘면 기생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활쏘는 한량들 뒤에 나란히 줄을 지어 서서 소리를 하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화살이 과녁을 맞히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여흥을 돋우었는데, 이때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대중들에게 빼놓을 수없는 오락으로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한량(閑良)이라는 말이 있다. 고려후기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특정 계층을 가리키던 말인데 선비 집안 출신으로 경제력이 있어 궁술, 무예등을 닦았으나 뚜렷히 맡은 직사가 없는 자제들을 칭하던 말로 중종때 그들에게 무과를 볼 수 있도록 하여 무인의 성격이 강해졌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한량이란 무과 응시생이나 잡과 응시생, 무과집안의 자제로 아직 급제하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들은 무과의 기본인 활쏘기에 능했기에 궁술에 능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허나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 무예 연마라는 핑계를 대고 아무일 않고 세월을 보내며 노는데 열심인 일부 한량들의 행태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 조선후기, 활쏘기를 즐기는 선비들을 속칭하여 한량(閑良)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팽배한 유교관으로 여성들에게 사회적 기회가 적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여궁(女弓,여성궁사)에 대한 역사는 뿌리가 깊다. 일찍이 의주나 북청등 북쪽지역의 여인들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치마사(馳馬射)에 강했다. 북방 변경지역을 지켜야하는 생존의 문제에 남녀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움추렸던 여궁의 역사가 다시 활발해 진 것은 조선말 개화를 겪으면서 부터다.
▲ 고운 한복을 입고 활을 당기는 여궁의 모습.
한량들 어깨너머로 활쏘기를 배운 기생들이 직접 활쏘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되어 부유층 여성이나, 신여성들을 중심으로 활쏘기가 유행하기 시작해 여성궁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화여대에서는 체육특기과정으로 습사(習射)가 있어 여성 스포츠로서 자리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민족성을 세계에 알리게 된 것도 여성 궁사들의 역할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여자 양궁이 20년간 6회 연속 금매달을 목에 걸게 되었으며, 세계 최고의 여자 양궁선수들의 실력은 그 옛날 중국이 두려워하던 활 잘 쏘는 동방의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만들었다.
▲ 대한민국의 독보적인 활 실력을 세계 만방에 알린 여자양궁.
잊혀져 가는 전통의 활쏘기
오늘 날 활쏘기는 올림픽 여자양궁의 좋은 성적 덕분에 각광 받고 있지만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기상이 배어있는 전통 활쏘기는 단순히 친목, 동호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대한궁도협회가 존재하고 있고 전국체전에 국궁(國弓) 종목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부 지원이나 관심은 전무하다고 봐도 될 만큼 열악하다. 당연히 전통을 이어가려는 전문 궁사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될 만큼 그 수가 적고 전통 활을 만드는 장인도 이제 열명이 채 안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쳐했다.
우리 역사에서 활은 빠진적이 없는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무기 이다. 앞서 길게 우리 역사속의 활쏘기 문화를 언급한 이유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대표 무예로써 전통활 쏘기를 지키고 이어 나아가야 하는데 대한 당위성을 이야기 하고자 위함이다. 유럽의 펜싱이나 중국의 무술, 일본의 검도가 브랜드화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깊은 활을 브랜드화 하고 전통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다.
사라져 가는 옛 민속 전통놀이의 하나로 치부해 버리기엔 우리민족의 역사속에서 활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전통 활쏘기를 살리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정부나 각 지자체들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지역 축제에서 전국 활쏘기 대회나 활과 관련된 축제를 기획하여 우리 전통의 활쏘기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강도균 취재팀장 / dkkang@thefestiv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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