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락 폭탄과 물통폭탄으로 일본의 전승축하연장에서 거사를 벌인 윤봉길의사의 사건현장은 중국 상해에 있는 홍커우공원(虹口公園)이다.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지금 그 곳에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의 쓰레기 더미에 한 조선인의 시체가 나뒹굴어 버려졌다. 그 얼굴의 미간에 정면으로 총알이 박힌 채 스물 다섯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그 날 아침에 이시카와현의 육군공병학교에서 가마니 위에 무릎을 꿇리고 십자가에 묶인 채 총살을 당한 그는 이 날부터 가네자와(金澤) 군인묘지 관리사무소 앞길에 13년간이나 방치된 채 묻혀있게 된다.
그는 1908년 충남 예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청년시절에 농촌계몽운동과 야학활동을 하였으며 시집을 발간하는 등 글 재주도 많았다. 또한 옷도 잘입는 호남형의 외모로 남부러울 것 없던 그였다. 만 18세가 되던 1930년 3월,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 라는 글을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났던 그는 우리의 자랑스런 매헌 윤봉길 의사였다.
도시락 폭탄과 물통폭탄으로 일본의 전승축하연장에서 거사를 벌인 윤봉길의사의 사건현장은 중국 상해에 있는 홍커우공원(虹口公園)이다.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지금 그 곳에는 자그마한 윤봉길 기념관이 있고 그가 남긴 어록 또는 유서와 같은 글이 걸려 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理想)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4억 중국 인민이 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일개 조선인이 해 냈다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유해는 광복 후에 고국 땅으로 돌아 와 지금의 효창공원에 이봉창, 백정기 의사와 함께 3의사묘에 안장되어 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www.yunbonggil.or.kr)도 발족되었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요즘 일각에선 친일파 명단을 발간하여 큰 일을 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 애국의 한 활동이며 과거청산의 큰 획을 긋는 정치사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네가티브 정치행동의 하나라서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일제 앞잡이와 한 통 속이 되어 현대사의 기득권세력이 되었다고 손가락질을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친일파 뿌리뽑기’보다 ‘항일투사 뜻 기리기’에 힘을 더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나라를 지키는 데 젊음을 바친 인물 들을 기리는 축제를 기획해 봄이 어떨까 싶다. 만주벌판을 재현하고 항일투쟁의 역사를 무대에 올리는 공연이 있고, 대한독립만세 체험축제라든가, 민족 자긍심을 높이는 역사인물 테마 축제가 더 많아져야 한다. 축제의 나라 프랑스나 가까운 일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위인 축제들을 우리는 더 공부해야 한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온 국민의 민족성 함양에 크게 공헌했듯이 근대사를 되 돌아보는 의사들의 삶을 재현해 봄이 어떨까? 모든 언론과 국민적 관심이 엉뚱한 데 쏠려 있는 요즈음이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뿌리와 그 정신이 4대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세종시 땅 속에 파 묻혀버려서야 되겠는가?
더페스티벌 칼럼니스트 / press@thefestiv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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