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에서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들리고
(하동 위태 ~ 산청 덕산마을)
“살아 있다는 것은 걷는 것이고, 걷는 것은 사유(思惟)하는 것이며,
사유하는 것은 곧 살아 있음이다”
나의 사유함은 글로 귀결되며 글을 쓸 때에야 내가 살아 있음이 증명된다.
그렇기에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왜 걷고 있는지, 왜 생각을 하는지,
왜 그것이 글로 표현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럼으로 걷는 것과 사유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하나의 개념으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것이다.
이것을 나는 나만의 용어로 “걷자생존”이라고 붙여보고 싶다.
“걷는 자 만이 생존할 수 있다”
지난 해 섬진강과 함께 걸음으로 나는 섬진강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단지 바라만 보는 섬진강과 함께 걷는 섬진강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었다.
그럼으로 섬진강을 걸으면서 나를 그 속에 투영시킬 수 있었으며
지리산을 걸으면서 나는 그에게 기댈 수 있었다.
엄마와 같은 섬진강, 아버지와 같은 지리산이다.
“저 고개를 넘으면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지리산을 나갈 때 마다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고개마다 다른 얘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오늘은 갈치재라고도 불리는 중태재를 넘어
남명선생의 정신이 살아 있는 덕산골까지 가야한다.
숲을 만나고 호수를 만나겠지?
그리고 산언저리에 지워질 듯 그러나 지워지지 않은 마을의 흔적들,
대나무 숲, 오래된 감나무, 돌담,
아마도 또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겠지?
소나무, 밤나무, 바위틈에 생명력 강한 이끼,
숲 사이로 내리쬐는 빛으로 빛나는 낙엽들,
그 푹신한 촉감으로 나는 또 행복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이 모두는 숲에서 얻어지는 기쁨이고 행복이다.
세상의 수많은 심오한 진리들과 이성적인 성과물과 철학들보다
숲을 이해하고 숲이 가진 성품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리라는 믿음이다.
무엇보다 숲과의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그럼으로 나는 오늘도 숲으로 간다!
위태를 출발하면 바가지 하나로 다 퍼 낼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저수지를 만났다.
비록 손바닥으로 다 가릴 수 있을 만큼 작은 저수지이지만,
아래배미 밭떼기에게는 이것보다 요긴한 것은 없으리라.
작다고 얕볼 것은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밭갈이 하시다 먼저 소에게 물 한바가지 먹이시고
당신도 이 물을 손으로 퍼 드셨을 것이다.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작은 손바닥만 한 저수지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갈한 목을 축여 줄 수 있다면
비록 작지만 이 땅에 태어남의 소명을 다한 것 아닐까?
작은 돌계단들, 그 위로 꼬마 나무꾼들의 재잘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요즘아이들은 무슨 추억을 먹고살까?
자연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되고 자연도태 되어버렸으니.
학교를 마치면 작은 지게나 새끼꾸러미만 가지고 산으로 향했었다.
하나의 놀이였고 습관이었고 생활이었다.
해가 서쪽하늘에 떨어지고 한나절 숲과 뒹굴면서 만들어 낸 작은 나무봇짐,
저 계단을 걸어 내려왔을 것이다.
지난 밤 봄을 알리는 가는 비에 낙엽은 포근했다.
하동사람들은 갈치재라고 부르고 산청사람들은 중태재라고 부르는
재에서 하동과 산청을 번갈아 본다.
중태마을은 30여 년 전 만하더라도 하동 땅이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산청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중태사람들은 산청사람이기도 하고 하동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구태여 중태재니 갈치재니 하면서 따질 일도 아니다.
갈치재 너머 첫 번째 마을인 유점마을과 떡바우골을 지나
중태마을에 도착하여 감나무 밭에 거름을 내시는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하동에서 왔다고 하니 반가운 듯
“이 땅이 옛날에 하동 땅인 걸 아는가?”
“예 압니다”
“어떻게 알어? 모를긴디!”
“책에 봐서 알지요”하니 고향사람 만난 듯 친절하게 옛 얘기를 해 주셨다.
아직도 하동을 고향으로, 하동사람인 나를 고향가마귀로 여기시는 듯하다.
사람이 사는 듯 살지 않는 듯 하는 유점마을에는 불과 서너 가구만 남아 있어
겨우 동네의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동네어귀 모퉁이에 바람을 맞고 서 있는 한그루의 감나무를 향하여
말을 걸어본다.
“니 그동안 잘 있었나?”
그리고 난 후 할머니 같고 할아버지 같은 나무, 그에게 귀를 대 본다.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부엌에 불 지피는 소리, 송아지 울음소리,
닭 모이를 주기 위해 닭을 부르는 소리 “쥬쥬쥬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