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 산내, 인월 의좋은 삼형제에게!
(남원시 매동마을 ~ 인월)
순수함이 때로는 제갈량과 같은 지략가를,
유비, 관우와 같은 덕장을, 장비와 같은 용장을 능가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내가 지리산을 감싸 안고 돌고 도는 것은 결국은 지리산이 가진 그 순수함,
아니 순수함의 척도인 지리산에 나를 비춰보고 싶은 것 때문이기도 하다.
지리산이 비록 용맹과 지략의 상징일지언정
그의 순수함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때론 다소 어눌할지라도 순수함만 갖춰진다면
그 몸짓은 가을에 나락을 영글게 하는 가는 빗줄기 같지 않을까?
세우(細雨)에 본 마천과 산내면 사이에 있는 실상사는
외견상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절로 보인다.
사람을 위압하기도, 화려한 단청(丹靑)으로 현란하지도 않다.
단아한 외관, 시멘트로 포장되지 않은 마당,
그 어떤 색상으로 덧칠해지지 않는 단순함이 민낯이다.
순수함으로 세월을 살아 낸 어여쁜 여인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그래서 실상사는 지리산을 맴돌면서 만난 몇 안 되는 보물과도 같다.
매동마을은 지리산둘레길로 인하여 그 고요가 깨어나고 있는 마을이었다.
온통 골목마다 넘쳐나는 민박안내판과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노인들만 있어 생명력이 쇠퇴하여 가는 다른 마을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최근 지리산자락에 움트고 있는 둘레길 답사 행렬은
이처럼 잠자는 마을을 깨우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년이 지나도록 명절에 찾아오는 자식새끼들 외에는 사람구경 하기가 힘든 동네에
화려한 옷으로 장식한 젊은이들이 제법 모여들어 온기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등달아 어른들은 사람구경도 하고 이들로부터 얼마 안 되는 벌이도 마련하는
일석삼조 이상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하동과 산청 보다는
지리산 북쪽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남원과 함양에서 더 또렷이 보였다.
지리산을 잘 팔아먹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지리산과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순수함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 지략만으로는 지속가능하지 못하듯
욕심을 부리지 마실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한다.
광천을 건너 장항마을을 올라서니 구름이 실상사를 덮고 있다.
가을의 문을 열어젖히고 비가 앞마당으로 들어서려 한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갈림길에서 아마 이 구름만 열어 젖혀 준다면
가을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장항마을 뒷산 어귀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다.
4백년이 넘었다고 하는 이 당산소나무는 그 수령에 비하여 청춘을 자랑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외길이다.
가는 비가 안개와 섞여 숲속에는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을 품을 대로 품은 소나무는 배가 볼록 불러
그 어느 때 보다 풍만하고 풍채도 있어 보인다.
기나긴 겨울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영양분을 지녀야 한다.
오늘 내린 비는 소나무가 겨울 여행을 떠나기 위한 풍족한 노잣돈이 될 것이다.
북풍한설에도 그 초연함을 잃지 말기를 염원한다.
역사의 진보는 천재적 재능과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열정을 가진
몇몇 선각자들에 의해 창조되지만
순리를 믿고 그 순리에 모든 것을 거는 민중들에 의해 정제되고 유지되어 왔다는 믿음이다.
지리산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번뜩이는 생각도 뜨거운 열정도 있지 않다.
오로지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이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이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순리에 따르는 것뿐이다.
그 원리에 따라 언덕배기에 걸터앉아 있는 마을이 중군마을이다.
고원지대에 자리한 중군마을은 이미 가을 깊은 곳에 들어와 있다.
다랑이 논은 황금들판으로 바뀌었고 배추와 무도 김장철을 대비하고 있다.
중군마을 골목에는 전설의 고향에 들어온 것처럼
벽화들이 골목을 이야기 길로 탈바꿈 시켜놓았다.
한 폭의 그림 속에는 옛날 어른들이 사랑방에서 도란도란 나눴던 얘기들이
모조리 들어앉았다.
옛날에는 이 이야기 몇 개로 아들 손자들 다 키웠고
몇 날밤을 새워도 모자라는 얘기 보따리가 있었다.
이 얘기보따리를 열어젖혔던 어른들은 오늘날 이 땅에 계시지 않다.
이분들 한 분 한 분은 모두 인간문화재 급인데
이분들이 계시지 않는 자리를 담벼락 벽화가 대신하고 있다.
그나마 이 벽화 이야기로 인하여 차가운 언덕에 달아 매인 마을에 온기가 돈다.
지리산둘레길은 마천면, 산내면, 인월면을 따라 기나긴 고원길이 펼쳐져 있다.
그 길을 경계로 북으로는 1187미터의 삼봉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룡산과 법화산이 좌청룡 우백호식으로 호위를 하고 서 있다.
그 세 개의 봉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 백운산이다.
지도에서 보면 이 네 봉우리는 역삼각형 모양의 철의 삼각지를 형성해 놓은 듯하다.
이들은 지리산과는 다소 거리를 두면서도 지리산에서 발원한 기운을 이어받아
백두대간으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중개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들을 발판으로 삼아 백두대간 종주 길로 활용되고 있다.
이들을 밟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 백두산 천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마천면과 산내면, 인월면은 이들 산의 삼각지에 둘러싸여 고원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해발 460미터에 가까운 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벼를 가장 일찍 심고 그만큼 수확도 일찍 하는 곳이다.
산의 삼각지가 마천, 산내, 인월 3개면을 철의 의형제를 맺게 했다.
산에서 맺은 의형제는 죽을 때까지 가는 법이다.
추석을 앞두고 대목장이 선 인월장은 3개면 의형제들로 붐벼났다.
인월장터 발 마천행 버스가 통통거리며 시동을 걸자
피로 맺은 유비, 관우, 장비의 형제들 보다
지리산의 순수함으로 맺어진 의좋은 삼형제인 마천, 산내, 인월을 뒤로하고
내 발걸음은 운봉을 향한다.
지리산의 의좋은 삼형제여 순수함으로 지리산을 지켜주시기를!
세상의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을 고향의 품으로 감싸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