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참판댁에 경사났네!" 광복66주년, 최참판댁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감동 감동 감동)
"태극기 휘날리며"
민족의 땅 평사리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제가 처음 애국가를 불렀던 기억은 1984년 7월 28일
논산훈련소 제28연대 신병훈련소의 수료식 시간이었습니다.
그해 6월 23일 입대한 저는 4주간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를 받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서 부르기 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었지만
그것은 단지"소리"였을 뿐, 의미와 감정으로 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물두 살 늦깎이 나이에 처음, 가슴으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송충이 한 마리 달고 바짝 군기든 이등병,
철모 밑에서 흐르는 눈물을 가눌 길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이 처럼 가슴으로 눈물 흘린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글자 한자 한자가 형상으로 다가왔고
그동안 알지 못할 암호와 같았던 애국가 가사가 난수표 풀리듯이,
전혀 들리지 않았던 외국어가 한방에 "뻥" 뚫리듯이 애국가가
가슴으로 이해되어졌습니다.
그 후론, 지금까지 그 어떤 장소에서든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한 번도 그 날의 <나의 애국가>를 떠오르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남자는 군대를 가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광복66주년은 저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민족의 대 서사시를 24년간 엮어내신 박경리선생의 생명사상이
눈물처럼 고여 있는 곳,
외세의 침탈에 맞서 항거하며 민족혼을 불러일으킨 진원지이자
서민의 삶과 애환이 땀이 되어 흐르는 곳 평사리...
지금이라도 서희와 길상이가 뛰쳐 나올 것 만 같고
감정헤푼 용이가 너털웃음으로 반겨줄 것만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최참판댁에서 광복절을 기념하여 특별한 공연이 열렸습니다.
비록 극단에서 희극형식으로 각색된 공연이었지만
가슴 찢어질 듯 외치는 "대한독립만세"에 마치 66년 전 그 현장에 있는 듯한
감격이 몰려왔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저렇듯 외쳤고
온 동족이 함께 울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7년 전 연무대 연병장에서 이등병이 가슴으로 불렀던 애국가와
대한독립만세가 오브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36도를 오르내렸던 뙤약볕에서 모자 밑으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땀을 닦는 듯, 눈물을 훔쳐 내렸기에 망정이지 눈물을 보일 뻔 했습니다.
비록 광복의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으로 살면서 꼭 그 현장에 있어야만 이해되고
그래야만 가슴으로 눈물 흘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름에 민족의 애환을 가슴으로 울고
함께 부둥켜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부모님은 일제치하에 살아가시면서 일본징용으로 끌려가셔서
온갖 고초를 겪으신 분입니다.
어릴적에는 "대판, 쟁변"과 같은 일본지명을 수 없이 듣고 자랐습니다.
탄광에서 징용생활을 하신 부모님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검이 되어 탄광에서 끌려 나오는 것을 보고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생사를 건 야반도주 끝에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처음 그 말씀을 들었을 땐 온 몸에 소름이 쫙 들었습니다.
"내가 재일교포 2세가 되고, 조센진으로 서러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약 6년 전, 일제치하 징용자 조사가 정부차원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의 분이 아니었지만
부모님 하신 말씀과 엄마의 기억을 더듬어 신청서를 제출했었습니다.
금년 4월 초 한 장의 통지서가 저에게 도착했습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심의 결정통지서”였습니다.
광복66년만이며, 저의 부모님 징용가신지 70여년 만입니다.
정부차원에서 조사결과 ‘징용사실이 확인되었다’는 최종통보였습니다.
이 일이 어디 저의 부모님 뿐 이겠습니까?
수많은 우리세대의 부모님들이 이억 만리에서 조국 없는 서러움을
당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완전한 해방이 되려면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 한 것 같습니다.
(‘토지’는 단순한 드라마나 소설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삶의 현장증언입니다. 그 리얼한 드라마가 최참판댁에서 펼쳐졌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독도를 "다케시마",
동해를 "일본해"로 운운하는 양심 잃은 짐승처럼 "컹컹"거리며 헤메고 있습니다.
저는 "善은 惡을 이긴다"라는 말을 명제처럼 삼고 있습니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일본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세계시민의 일원으로 나아오길 소망합니다.
민족혼의 상징 평사리
그리고 그 토지를 내려 보고 있는 최참판댁은
애국과 민족혼의 표상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거든,
생명의 경외감에서 나태해졌거든,
그리고 땅과 흙냄새가 그리웁거든
평사리로 오이소!
넉넉한 가슴이 안아 줄 것입니다.
(원숭이가 아니라 고릴라 같네요... 변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하동시장입니다. 올 추석에는 하동시장에 오셔서 추석장 좀 보고 가이소!)
하동시장에 원숭이가 나타났다!
촌아 울지마!
한 초등학생의 일기장에 씌어진 시골애환곡입니다.
초등학생의 눈에도 촌은 울고 있었나 봅니다.
어릴적에 신작로를 따라 엄마치마를 붙잡고 시장에 따라나섰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풍경입니다.
달구지, 신작로, 성냥간, 고무신 .....
난생처음 먹어 본 짜장면도 읍내 시장이었습니다.
어찌나 늦게 나오던지....
그렇지만 그 꿀맛 같았던 맛은 지금 어느 중국음식점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광양에서, 구례에서, 남해에서...
어릴적 생각에는 전국 조선팔도의 사람들이 하동시장에 다 모인 듯 해 보였습니다.
자칫 하다가 엄마 치마라도 놓치는 날에는 집에도 못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도 몇몇 점포는 엄마의 외상이 매번 통했던 곳이 있는데
가끔씩 그 곳에서 저도 신발을 사곤 합니다.
그랬던 시장이 요즘에는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붐벼야 할 장날은 때론 한산할 정도이고,
상인들 얼굴에는 웃음보다는 주름이 가득합니다.
관에서 장옥이다, 간판이다, 도로다....하여 돈을 쏟아 붇고 있지만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시대가 만들어 놓은 것인걸요.
시장도 이제는 변화의 몸부림을 쳐야 할 때입니다.
예전에 제가 엄마 치마를 잡고 따라다질 때에는 배짱장사를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어림도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간, 하루아침에 문 닫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아직도 그런 위기감을 잘 느끼지 못한 듯합니다.
옛날의 영화를 지금도 그리워하고 향수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상인의 위기감과 낮은 자세가 선결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이 정부차원의 지원입니다.
어떻든 요즘 재래시장은 많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하동시장에 원숭이가 나타났다!
소문듣고 온 장꾼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슬슬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상인들도 신기하여 점포를 비워두고 간이무대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시장에는 고무줄 장사, 야바위꾼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공연"을 연출했건 만
이제는 철저하게 기획된 공연을 해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이윽고, 장구와 온갖 북이 달린 드럼이 차려지고
원숭이 한 마리가 나와 온갖 재주를 부립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생소한 장면에 웃음을 쏟아내고
상인들도 이때쯤 되면 장사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원숭이 공연에
몰입된 시간입니다.
알고 보니 이 공연의 주인공은 원숭이 복장을 한 한상덕 경상대학교 교수였습니다.
고향이 하동인 한교수님은 중국에서 배운 원숭이 공연과 각종 기예를
교수라는 근엄한 자리에서 내려와
기꺼이 위기에 처한 고향 시장을 위해 그의 교수라는 체면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것입니다.
그것도 화려한 무대가 아닌 시골의 작은 시장바닥에서 말입니다.
시장살리기는 불광불급 (不狂不及)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각오로
시장살리기에 올인했던 한 공무원의 아이디어와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시장업무를 담당하는 날부터 출근은 시장을 통해서,
점심도 시장에서, 퇴근도 시장을 둘러보곤 집으로 향했습니다.
거의 모든 시간을 시장에 살다시피 했고
억세기로 소문난 시장상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디자인 교수가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시장으로 끌고가다시피
시장을 보여주고 시장에서 함께 고민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시장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도 "재래시장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미친 듯한 열정이
포기 일보직전의 시장을 꿈틀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시장만 머리에 가득했던 이용우계장,
그는 이제 그 열정의 댓가로 승진을 하여 옥종면장으로 영전을 해서
한 고을의 책임자로 논두렁과 경로당을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옛날, 엄마치마자락 잡고 따라갔던 시장을 회상해 봅니다.
연출되지 않았지만 완벽에 가까웠던 축제의 공간이었습니다.
광케이블, 아니 요즘의 스마트폰이다 와이파이다 하여
초고속 인터넷보다 더 빠른 정보의 광장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이 넘쳐흘렀던 情의 보고였습니다.
재래시장이, 옛날과 같은 그 영화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아름다웠던 전통을 지켜내고 상인은 물론 장꾼들까지도
이 시장에서 함박웃음을 피워내는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