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재첩 : 장마가 한창인 가운데 하동포구에서 재첩선별에 한창손놀림이 바쁘신 할아버지! 많이 잡아 부~자 되세요!)
모처럼 곤하게 늦잠을 잘 기회,
채 여섯시가 되기 전에 심상찮게 느껴지는 문자도착 음이 들렸습니다.
금일 04:30분 호우주의보 발효,
전직원 1/3비상근무 실시....
재난안전대책본부
해마다 여름이면 몇 차례 늘 있어온 일이지만
토요일 새벽을 깨운 수상쩍은 문자음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습니다.
샛강이 범람하고,
수박이며 양상치며.... 온갖 청정야채가 가득한 비닐하우스에
물이 차올라 많은 피해가 우려됩니다.
자식같이 소중한 농작물이 더 이상 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간절히......
빌어봅니다.
(이 땅의 천사, 정옥수권사님! 교회에서 찬양은 늘 온몸으로 드리셨습니다)
지상의 천사, 천상의 천사가 되다!
덤뿍 덤뿍 퍼 주시면서도 더 주지 못해 늘 미안 해 하시던 정옥수권사님!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될 지난주 월요일 새벽에 천상의 천사가 되셨습니다.
일흔 세 해,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세월동안 이 땅에 참 귀한 향기를 퍼뜨리셨습니다.
마을정자 아래 있는 경로당에서는 막내로, 늘 음식을 싸 나르시고, 청소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셨던 동네 큰 며느리셨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드렸고, 찬양을 부를 땐 덩실덩실 온 몸으로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젊으셨을 때에는 자녀 뒷바라지에다 공직자인 남편을 대신해 수십 마지기 대농사를 머슴들과 씨름하면서 억척같이, 황소처럼 일을 쳐 내셨습니다.
늘 미소로, 칭찬과 격려로, 동네에, 이웃에게, 성도들에게 따뜻한 이웃이자, 며느리이자, 천사였습니다.
마지막 천국 환송예배가 드려지는 날, 잔잔한 장맛비가 장단을 맞춰 환송연을 더 뜻 깊게 했습니다.
이 땅의 천사 사명을 다 마치고 이제 천국의 천사로서 하늘나라를 향기롭게 하실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재첩주산지 하동 하저구)
우중재첩
비 오는 날,
섬진강엘 나갔습니다.
나룻배에서 잡은 재첩을 선별하는 일로 촌로의 손놀림이 바빴습니다.
요새 채첩 잘 잡혀요?
없어, 통 없어!
왜 재첩이 옛날보다 적게 잡혀요?
짠물이 올라와서 재첩을 못 자라게 하지
섬진강에 댐을 만들고 그나마 내려오는 물도 저쪽?으로 마구 퍼 가기 때문에
재첩이 못 자라
돈 많이 벌어요?
많이 못 벌어, 공동작업을 하기 때문에 같이 일하고 같이 분배하지
그럼 열심히 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래도 다 같이 내 일처럼 열심히 해야 돼
1년에 몇 달 정도 재첩이 잡혀요?
5월 6월 두 달 정도 돼!
장마철이 되면 재첩이 강바닥 1미터 아래로 숨어버려
사진 좀 찍을게요 어르신
사진 안 찍는게 좋아
어르신 얼굴은 안 나오게 찍을게요
그래도 안 찍는게 좋아
하동포구에서 만난 재첩잡이 어르신은 재첩처럼 순박하기만 했습니다.
재첩 많이 잡아 행복했으면 합니다.
(섬진강 건너 광양 무동산에서 본 섬진강과 하동읍내 풍경. 재첩잡이배가 강 가운데에서 회전몰이를 벌이고 그 뒤를 따라 강물이 회오리 치는 모습)
아, 하동이여!
어렸을적에 제가 가장 부러워했던 사람 중에 하나는
방앗간 집 아들, 술도가 집 딸이었습니다.
큰 노력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 한 일이었지만
술도가를 운영했던 한 분은 당시 제가 다녔던 교회에 매주 5천원의 헌금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5천원은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던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금액이었습니다.
방앗간에 가면 세도가처럼 권세를 부렸던 방앗간집 아들은
방아를 찧어주고 난 다음에 수수료조로 쌀을 얼마나 많이 퍼 가버리던지...
비록 어렸던 저였지만 속이 쓰리고, 가슴이 아린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땀 흘려 지은 농사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기도 했지만,
불과 채 한 세대가 되기도 전에 그 분들은 지금 더 이상 방앗간도,
술도가도 하지 않습니다.
모두 폐쇄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현재의 하동군청 소재지인 하동읍은 섬진강이 끼고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도시입니다.
강 건너 무동산에서 내려다 뵈는 하동읍내는
마치 재첩잡이 배가 강물을 휘감아 돌듯이
섬진강이 읍내를 휘감아 돌면서 완만하고 풍만한 곡선을 형성하여
하동이 느림과 여유의 천혜의 지세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하동읍이 생기기전 하동군의 읍기(邑基)는 지금의 고전면 주성마을 인근의
하동읍성에 있었습니다.
하동군의 역사는 대략 이렇습니다.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국 중 낙노국(樂奴國)에 속하였다가
백제의 세력권에 들면서 다사성 (多沙城)으로 불려졌습니다.
신라가 통일을 하면서 한다사군 (韓多沙郡)으로 불리면서
읍기를 고전면 고하리에 둔 이래
고려와 조선을 거쳐 임진왜란 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불타 없어진 후
1703년 지금의 하동읍으로 이전하기 까지 천년을 지켜온
하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지난 현충일날 아침,
막 아침해가 솟을 무렵 천년고도, 고하리의 하동읍성에 올랐습니다.
읍성은 그 천년의 위용을 다시 세우기 위해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성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믿어지지 않는 평범한 동네,
아이들이라도 단숨에 뛰어 오늘 수 있을 것 같은 해발 백미터도 될까말까 하는
낮은 능선 같은 산, 그 속에 토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곽의 윤곽이 뚜렷히 남아 있기는 하나 곳곳에 무너지고 흘러내려
세월의 흔적이 온 성안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고증을 거쳐 복원중이기는 하지만 다소 쌩뚱맞게 데크로드를 설치하고
황토색 칠을 덧입힌 시멘트 포장,
사람의 손이 간 만큼 파괴요 공해가 덧 씌워지는 듯 보였습니다.
성 가운데에는 아직도 민가가 자리하고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듯, 곳곳에 옛 관아모형 처럼 생긴 건물자취가
땅 바닥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 이곳이 천년 하동을 지켜온 하동의 정신이 살아 있었던 곳이었구나!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한, 진한, 변한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
한 때는 신라에, 또 한 때는 백제에 병합되는 혼전의 역사가
점철되었던 곳 이었구나!
결국은 온 백성이 가토 기요사마에 맞서 항전하다,
장렬히 그 최후를 맞이했었다!
오늘의 행복, 오늘의 평화는 결국 이러한 역사의 대 항전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하동읍성이 능선과 능선 사이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듯이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평화는 싸움과 싸움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누리고 있는
찰라의 평화, 순간의 행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치열했던 싸움,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단지 몇 줄로 기록된 역사책에 의존할 뿐입니다.
하물며 오늘 내가 살아가는 나의 기록들, 내 발자취하나도 다 지워지고
잊혀질 것입니다.
왕성한 복원사업,
그러나 세월은 그 복원의 노력조차 잊어버릴 것입니다.
차라리 어설픈 복원보다는 그냥 세월의 때가 뭍어 있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더 가치가 있어 보일 것 같았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많이 슬퍼졌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나의 발자취...
이 모든 것이 다 잊혀질 것입니다.
성 안에 자리 잡은 대나무 숲,
올해도 그 해 처럼 죽순은 새로 피고
그해와 같은 뻐꾸기도 노래하지만
어제의 죽순이 아니고 어제의 그 새가 아닐 것입니다.
읍성이 복원된들 어제의 그 읍성이 아닐진대,
차라리 무너진 토성을 보면서 세월의 향취라도 느끼고 싶어졌습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나의 자리도 내일 또 다른 주인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성곽 안으로 난 대나무 숲 오솔길에 서서 세월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읍성은 무엇일까?
무너질 줄 알면서도 세워야 할 성은 무엇일까?
저의 스마트폰 기록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답게 살고,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나로 인하여 행복해할 사람 한 둘이 있다면....
나 또한 하동읍성 못지않은 성을 쌓은 것이리!"
문득 무너진 토성을 밟고 내로오면서 고려말 길재의 시 한 수가
머리를 감싸고 돌았습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거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아, 하동이여!
아, 세월이여!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