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침일찍 웃자란 호박넝쿨을 정리하시는 "꽃순이"입니다. 비올 때는 호박부침이상 있나요?)
비 떠난 자리가 이렇게 청아하고 맑을 수 없습니다.
비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지만
긴 장마로 인해 그렇게 햇빛을 사모했었나 봅니다.
장마 중에 단 몇 분씩 구름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일 때면
처음만난 하늘인 냥 하늘을 응시하기도 했습니다.
우중에 별 탈은 없으셨는지요?
저의 편지를 받아 보시면서 이제 하동과 같이 호흡을 하게 된 분들도
꽤나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보시는 모든 분들께 평안이 있기를 빕니다.
이번에는 하동의 수해와 관련한 얘기,
그리고 하동의 자랑 최참판댁에서 열리는 달빛 시 낭송회와
하동의 뿌리와도 같으신 김신수 선생을 소개 해 드리고자 합니다.
(약방의 감초, 국군아저씨들입니다. 빗속에 잠긴 상추를 긴급 후송하고 있네요)
특별재난지역 맹길어 주이소!
“그렁그렁 그르렁 그르렁!”
새벽 두 시 즈음 천둥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요새 천둥소리는 세상에 할말 다 못하고 가슴앓이 하는 것처럼
가슴으로만 그르렁거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했던가요?
천둥번개치고 호우주의보 내린 날은 자라본 가슴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일종의 직업병인가 봅니다.
시간당 80밀리에 가까운 폭우가 내려 집이 쓸려 내려가고 산사태가 나고,
출하를 앞둔 수박이며 채소며....순간에 아작?이 나 버렸습니다.
결국은 소중한 두 명의 생명도 산사태로 매몰되는 비운의 사태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有備無患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우리끼리만 유비무환이겠지요.
대 자연의 섭리에 유비무한은 차라리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너무 인간이 경거망동한 것은 아니었나요?
인류의 개발행위와 광적인 과학만능주의를 뒤돌아보면서
차라리 대자연의 이치와 섭리에 겸손한 모습이 사람다운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중학교 지리시간에 배운 상식에 따르면
하동은 국내 최다우 지역으로 연간 1,600밀리 가량이 온다고 합니다.
강의 수량이 가장 적을 때와 많을 때의 차이를 말하는 하상계수를 기준으로
섬진강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700대 1이 넘는가 하면
콩고강은 불과 4:1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갈수기의 섬진강은 빼빼마르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대홍수기에는 그 풍만함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지난 토, 일요일에 내린 비는 해마다 여름이면 상습적으로 겪는
일종의 연례행사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물난리가 없는 해가 특별한 해이기도 합니다.
이틀 동안에 500밀리에 가가까운 비가 퍼붓고
피해가 예상외로 늘어나자 중앙에 하동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줄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될 경우 지원금액이 대폭 늘어나고
복구를 위한 지자체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부디 하동군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어 축 쳐진 군민들의 어깨에
힘 좀 실어 주이소!
(퇴근길에 섬진교에서 한 건 했습니다. 오늘 밤 달빛샤워가 예사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유월 보름이군요)
최참판댁에서 詩와 함께 달빛샤워를
얼마 전에 업무차 대전엘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삼계탕으로 저녁을 먹고 인근 시가지를 둘러봤습니다.
모처럼 비까번쩍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도 보고
촌놈들이 화려한 거리에서 눈요기도 좀 했습니다.
영특하기로 이름난 저와 동고동락을 하는 동료인 이영진 왈,
‘계장님, 오늘 네온싸인 샤워 좀 했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한번씩 도시 나들이를 하고
또 밤에는 화려한 네온싸인에 노출시켜 샤워도 해야 한다나요?
저는 체질상 네온싸인 샤워가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인데요
요새 새내기들은 아침저녁 샤워는 안 해도 문제가 없지만
네온싸인 샤워를 못할 경우에는 견딜 수 없는 문화적 지체현상을 겪게 되는가 봅니다.
오늘은 비록 지루한 우중(雨中)이지만 달빛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하동은 밤에는 완벽한 밤이 되는 곳입니다.
덕분에 하동에서는 한달에 한번씩은 제대로 된 달빛샤워를 즐길 수 있습니다.
특히 달빛이 섬진강에 비칠 때에는 숨이 막히고 말을 잃게 됩니다.
한번은 보름달이 동쪽하늘에 막 턱걸이를 하고 올라올 무렵 강 건너 광양을 차로 달리다,
섬진강에 텀벙 빠져버린 달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뻔 했지 않았겠습니까?
“섬진강에 달이 빠졌다아~~”
하동의 달빛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달빛이 詩와 조우하면 어떤 모습일까요?
고향이 하동인 이병주선생은 일찍이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설파하셨다지요.
그 신화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곳이 바로 하동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태양보다는 은유적인 멋이 더 드러나는 월광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블로그 닉네임도 저의 이름을 차용해서 ‘월광’으로 명명하였고
대표 음악도 베토벤의 월광곡이기도 합니다.
점차 하동의 문화적, 인문적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최참판댁에서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 되면 달빛 시 낭송회를 갖습니다.
하동문인협회 멤버가 주축이 된 평사리문학관에서 주관을 하는 이 행사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동네 아낙네들과 할머니들,
가까이는 구례, 남원 멀리서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도
시와 하동의 달빛이 좋아 찾아오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장맛비가 아직 내리기 전 유월 중순 어느 토요일,
달랑 카메라 하나들고 찾은 최참판댁은
이미 달빛에, 찻 빛에, 질펀하게 젖은 시의 운율에 녹아져 있었습니다.
초청된 시인은 전라도 사투리가 약간씩 비치는 장철문시인,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한번씩 제주도 탈옥을 시도하지만
늘 무위로 끝나기를 반복하는 변종태시인,
부산의 딸답게 자갈치 아지매의 갯냄새가 물씬 풍기는 박정애시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삼도의 시인이 다 모였더군요.
장철문시인은 자리를 같이 한 아내에게 시 한수를 지어 받쳤습니다.
신혼 (新婚)
아내의 몸에 대한 신비가 사라지면서
그 몸의 내력이 오히려 애틋하다
그녀의 뒤척임과 치마 스적임과
그릇 부시는 소리가
먼 생을 스치는 것 같다
얼굴과 가슴과 허벅지께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오래 전에
내 가슴께를 스적인 것이 만져진다.
그녀의 도두룩하게 파인
속살 주름에는
사람의 딸로 살아온 내력이 슬프다
우리가 같이 살자고 한 것이
언젠가
변종태 시인의 제주도 사랑은
차라리 애증(愛憎)으로 승화되었습디다.
<섬놈>으로서 <육지 것들>이 부러워
때로는 섬을 탈출하고 싶어 맘먹고 차를 두어 시간 달리니
바로 섬의 끝자락,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인 것을.... 한탄했다고 했습니다.
늘 제주도를 동경했던 <육지 것들>로 산다는 것이
이날처럼 그렇게 자랑스럽고 행복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씩 시인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고 그들의 삶이 어떨지 상상도 해 봅니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에 사로잡혀
옴짝달싹도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시인이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평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시와 가깝게 하고 시와 더불어 더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산통과 같은 작업을 통해서 태어난 시 한수가
치친 영혼을 살리고 다시 일어날 기운을 불어 넣어 준다면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 한껏 자랑스러워 해도 될 것입니다.
평사리문학관을 지키면서 하동문인협회장을 맡고 있는 최영욱시인은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인 사람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시인 아닌 또 다른 삶을 실증해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최영욱시인이 본인의 시 가운데 가장 애정을 가진다는
시 한수를 소개 해드립니다.
주름
바람이 강의 흐름을
접었다 폈다 한다
강에 담긴 산도 달도
섰다 흔들렸다 한다
바람탓이다
상처탓이다
강의 물결은 바람으로 일고
지리산 꽃들은 신음으로 핀다
한여름 밤 최참판댁의 소설낭독회는 또 어떤 모습일까요?
오는 광복절을 하루 앞 둔 백중날 저녁
하동의 문화아이콘 최참판댁에서 박경리의 후예들을 만나보세요!
그리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 맞을 서희도 만나보세요.
어느덧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8월 14일 백중날, 최참판댁 사랑채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달빛샤워로, 몸과 영혼과 감성을 촉촉이 적셔 줄 것입니다.
(60년의 포스가 느껴지시지 않으세요? 목석 김신수 선생님입니다)
木刻의 神 김신수 선생, 세상에 혼을 불어 넣다!
육십년 동안 오로지 한 길, 나무에 혼을 불어 넣는 일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木石 김신수 선생입니다.
올해로 일흔 중반에 접어든 분으로서
시골에서는 젊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늙었다고 할 수도 없을 연세입니다.
선생은 제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남쪽으로 약 5백 미터 길가에 살림집 겸
서각 작업장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주 부근을 지나다니면서 선생의 작업하시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 왔었는데
그 작업광경이 어찌나 한결같고 일에 몰입하셨던지 꼭 한 번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그날도 선생께서는 작업실 밖에서 온 몸에 땀이 범벅이 된 채 나무기둥과 씨름하고 계셨습니다.
선생께서는 6. 25전쟁 종전 후 50년대 중반 선생의 나이 열다섯 살 쯤 되었을 무렵
부산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면서 우연히 부산시청사 정문에 걸려 있는
시청현판에 매료된 것이 선생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현판이 얼마나 멋지게 보였던지 현판 밑에서 떠날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자주 부산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가실 때 마다 시청현판을 찾아가
만지기도 하고 밑에 앉아서 놀기도 하셨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을 만난 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운명이 될 줄 몰랐었지..
그러면 근 60년을 같은 일을 하셨네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이 일로 생계유지가 되었습니까?
우스운 소리야, 생계가 될 수 없었지..
그러면서도 근 60년을 이 일을 해 오셨네요?
딴 이유는 없고 그저 그만 내가 좋아서 하고 집어서 (싶어서) ...
예술인지 아닌지도 생각도 없었고 딴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어...
사실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지
지금은 연장도 발달되어 수십, 수백 가지가 있지만
그 때에는 단지 끌 몇 개로만 모든 작업을 했었지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누구셨어요?
선생은 무슨... 스스로 터득했어, 수십 번 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지
서각 교본이라든가 보고 배울 것도 없었고
지금에 와서 누가 젤로 생각이 나셔요?
집사람이지, 돈도 안돼는 일을 했었지만
우리 집사람은 한 번도 왜 돈도 안돼는 일을 하느냐,
이제 그만하라는 말 한 번도 안했어..그게 고마워
이제 선생님의 가업을 이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요,
가업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어, 그냥 내가 좋아서 한 일 뿐이니까..
젊은 학생들이 와서 배우겠다고 많이들 찾아왔지만 내가 말렸어
돈 안 되니 시작하지 말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 누가 선생님의 대를 이어요?
전국에 이미 수천 명의 제자들이 있지
굳이 업으로 하지는 않지만 서각이 저변으로 많이 확대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아주머니께서 선생님이 어지러 놓으신 작업장을 청소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들어오셔서 바닥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거의 60년간 매일 그렇게 하루를 마감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반복된 세월이 선생을 목각의 신으로 만들어 놓으셨고
선생이 터치하는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혼을 되찾게 된 것이겠지요.
저를 배웅해 주시면서 바라보시던 미소가 얼마나 다정하고 잔잔하던지
마치 선생께서 혼을 불어 놓으신 목상과도 그렇게 닮아 보였습니다.
이 시대의 말없이 행동하는 극소수 중의 극소수 목석 김신수 선생,
그의 목석에 불어 넣는 창작의 혼이 세상 깊이 파고들어 사람들의 가슴마다
따뜻한 혼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