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에 울려 퍼지는 ‘암행어사 출두야’
(남원시 인월 ~ 운봉)
남원에 들어서면 향기가 난다.
그 향기의 근원이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우리의 선조들과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낸 흔적이
한 겹 한 겹 쌓이고 그것이 화석처럼 굳어져 토양이 되고 향기가 되어
퍼지고 있는 곳이리라.
그럼으로 우리가 오늘 날 맡는 땅의 향기는
어제 오늘의 몸짓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가운데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땀이 배이고 울림이 남아
퍼져나는 노래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남원은 참으로 우리 땅의 보석가운데 하나다.
남원 땅을 지나가면 그 어디에서든지 춘향이가 맞아 줄 것 같고
향단이가 나풀거리며 수라상을 날라 올 것 같다.
어디 남원 뿐 이겠는가?
목포에 가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구슬프게 들려오고
아직 나에게는 상상의 도시로 남아 있는 군산에서는
뱃고동 울리는 통통배가 일본으로 중국으로 나를 실어다 줄 것 같다.
도시 만이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이런 향기와 냄새가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만의 진한 향취 말이다.
슈베르트는 그 선율에서 독특한 슈베르트적인 정취가 살아 있다.
그를 들으면 우수에 젖은 슈베르트가 옷깃을 세운 채
골목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오브랩된다.
젊은 바리톤 ‘괴르네’는 슈베르트를 어떻게 그처럼 잘 소화해 내는지
슈베르트의 환생과도 같이 느껴진다.
고요하다 부서지고, 깨어지고 갈라지다 다시 정적으로 휘감아 도는
「마왕」이나 「물레방앗간의 아가씨」는 오로지 슈베르트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남원은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한 자기색깔을 지닌 도시다.
어디에서 이런 향기와 색깔이 생겨났을까?
자연과 사람이 한껏 잘 어울려 오방색으로 덮여진 도시와도 같이 연상된다.
음과 색이 조화를 이루어 멋을 이루는 그런 도시다.
시끌벅적한 인월장터를 벗어나 다시 산중턱으로 나의 무대가 옮겨진다.
추석을 하루 앞둔 날치고는 산자락 동네들이 한적하다.
가장 낮은 곳이 해발 오백을 넘는 곳인데다 지리산의 중턱에 나는 서 있다.
그래서인지 독수리를 타고 날아가는 느낌이다.
오른쪽은 백두대간 주능선인 고남산과 수정봉이 북으로 달리고
왼쪽은 바래봉과 고리봉이 천왕봉과 연결되어 있다.
뒤를 돌아보면 인월과 운봉이 놓여 있는 곳은 분지형태로서
그 깊은 골에 두 동네가 살포시 내려 앉아 있는 형국이다.
겹겹이 겹쳐 있는 지리산 주능선의 골짜기들이
마치 도미노 놀이를 하는 것처럼 연하여 서 있다.
첩첩이 겹쳐진 이 산들이 말없이 이 산하를 지켜왔다.
휴가를 나온 아들 예찬이와
유학차 한양에 갔다가 어렵사리 내려온 기훈이가 동행을 해서인지
숲속이 꽉 찬 느낌이고 호랑이를 만나도 당해낼 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준 힘이다.
우리가 서 있는 바래봉 허리 즈음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저 멀리 황산이 앉은 자세를 하고 있다.
오래 전에 이곳에서는 피의 혈전이 벌어졌었다.
고려 우왕6년 1380년에 이성계가 왜구와 맞서 싸운 곳이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바위에 피가 묻어 피 바위가 되었다는 곳도 있다.
작고 하찮은 황산이 지리산의 기운을 힘입어 큰일을 해 낸 것이다.
이것이 남원의 기상으로 자리를 잡는데 크게 기여를 했을 것이다.
이성계의 힘이 이곳에서 살아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 왕조를 이룬 힘의 근원이 여기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황산대첩비가 모셔진 비전마을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넘쳐났다.
억세고 강한 기운이다.
일찍이 가왕 송흥록이 기초를 세우고
송광록과 송만갑, 전도성, 유성준과 이선유로 이어졌다 하는
소리의 맥이 분출한 곳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동편제와 서편제로 전해오는
소리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한 것이다.
이 양대 산맥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 강이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것을 동편제라 하고 서쪽의 것을 서편제라 부른다.
동편제는 지리산을 닮았다.
그 소리는 호쾌하고 진중하며 쇠가 울어대는 소리와도 같다.
내가 어릴 적에 이동식 야외전축이 우리 집에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이 전축을 아예 보듬고 사셨다.
레코드라고 해야 춘향전이 전부였지만
산이 떨리고 계곡을 울리는 소리에 숨죽이며 들었던 그 소리다.
때로는 암행어사 출도 즈음에는 천둥번개라도 칠 것 같다가도
사랑가를 부를 대목에서는 새벽에 이슬이 내리는 고요함과도 같았다.
이 소리는 지리산의 맥을 이어 받았을 것이다.
남원, 구례, 하동에도 이 소리의 맥이 연하여 흐르고 있다.
지리산이 백두대간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듯 소리의 맥이 흐르는 것이다.
유성준과 이선유는 하동 악양 출생으로 동편제의 법통을 이어받은 명창이었다.
오늘날 이분들에 대한 공적을 기리는 작업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어
늦은 때이지만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이것이구나,
남원에서 나는 향기의 근원지가 바로 이것이구나,
지리산이 기초를 놓았고
피를 토하며 이 땅을 지켜 내었던 우리 선조들이 기둥을 세웠구나,
이것들이 우리의 소리 동편제를 토해 내었구나“
남원의 체취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소리다.
심장으로, 혼으로 피를 토하는 소리를 지리산이 뿜어내었고
이 땅을 몸으로 막아 내신 분들로 하여금 소리로 화한 것이다.
운봉평야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다시 독수리가 날개 짓 하는 기운을 느낀다.
아니 독수리의 등에 타고 천왕봉에서 날아 바래봉 위에서 선회를 하다
황산에 내려앉아 거기서 발하는 소리를 들으니
이는 지리산에 울려 퍼지는 암행어사 출두다!
청패역졸(靑牌驛卒) 수십 명이 구경꾼같이 드문 듬성 늘어서
어사또 눈치를 살필적의 청패역졸 바라보고 뜰아래로 내려서며
눈 한번 꿈쩍 발 한번 툭 구르고 부채짓 까닥허니
사면의 역졸들이 해 같은 마패를 달같이 들어 메고
달 같은 마패를 해같이 들어 메고 사면에서 우루루루 삼문을 후닥닥!
"암행어사 출두야 출두야 암행어사 출두허옵신다!"
두 세 번 외는 소리 하날이 답숙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백일벽력(白日霹靂) 이 진동허고 여름날이 불이 붙어 가삼이 다 타는구나.
각읍 수령이 겁을 내여 탕건 (宕巾)바람 보선발로 대숲으로 달아나며
"통인아 공사궤(公事櫃) 급창아 탕건 줏어라"
대도집어 내던지고 병부 입으로 물고 힐근 실근 달아날 제
본관이 겁을 내어 골방으로 달아나며 통인의 목을 부여안고
"날 살려라 통인아 날 살려라"
(발췌 : (사) 한국판소리보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