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AN STORY FESTIVAL 2012
공식행사(개막식): 이야기 속의 Opening Ceremony 9.21. 18:00-21:00 (예당호조각공원)
특별행사1: 애플리나의 이야기 세상 <옛이야기 속의 사과> 9.21.~23. 10:00~21:00 (의좋은형제공원)
특별행사2: 전국 이야기 픽토그램 제작공모전
특별행사3: 임존성이야기와 픽토그램 퍼레이드 9.21.~23. 10:00~21:00 (임존성/사랑길)
체험행사1: 꿀사과이야기체험마을 9.21.~23. 10:00~18:00 (의좋은형제공원)
체험행사2: 내가 만들어 보는 사과조형물 9.21.~23. 10:00~18:00 (의좋은형제공원)
체험행사3: 사과소망등만들기 9.21.~23. (의좋은형제공원)
체험행사4: 사과나무 서각체험 9.21.~23. 10:00~18:00 (의좋은형제공원)
체험행사5: 나는 픽토그램 놀이와 이야기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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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행사13: 금나와라 뚝딱 북콘서트
예산의 옛이야기
■ 묘순이 바위 전설
임존성에는 성의 축조와 관련된 전설이하나 있다.
삼국시대 백제가 고구려, 신라, 당나라 등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 성을 축조할 당시 이 고을에는 힘이 센 장사 남매가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한 집안에 장사가 둘이 있으면 나라가 망한다 하여 고을 사람들이 묘순이 어머니에게 둘 중 한명은 죽일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둘 중 한명을 죽일 것을 결정하고 내기(시합)를 시켜 지는 사람을 죽이기로 하였다.
묘순이에게는 수천의 군사를 주어 성을 쌓게하고 오빠 묘덕이 에게는 나막신을 신게 하여 한양(당시는 부여?)에 있는 왕에게 성을 쌓았다는 보고를 하고 올 것을 지시하고 묘순이가 성을 다 쌓을 동안 오빠가 도착하게 되면 묘순이를 죽이고 오빠가 늦게 도착하게되면 오빠를 죽이기로 하고 시합에 들어간다.
묘순이가 혼자서 열심히 성을 쌓아 거의 다 완성하려 하자 어머니는 고심을 하게 된다.
그 당시에도 남존여비 사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마지못해 한명을 죽이지만 그래도 아들을 살리고 싶은데 한양으로 간 아들은 소식이 없고 묘순이는 성을 거의 다 완성하고 성문만 남겨놓게 된 것이다.
이에 어머니는 꾀를 내어 묘순이에게 콩이 많이 들어간 설익은 콩밥을 지어주고 힘이 들으니 먹고 할 것을 제안한다.
생사를 건 시합이지만 어머니의 정성을 뿌리치지 못한 묘순이는 콩밥을 먹게 되는데 설익은 콩인지라 잘 씹히지가 않아 시간은 자꾸 지연되고 어렵게 밥 한 공기를 다 먹은 묘순이가 막 성문을 달으려는 순간 한양에 갔던 오빠가 도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묘순이는 고을 사람들에 의해 성문을 달으려고 자신이 깍아 놓은 바위돌로 눌러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이후 언제부터인가 지금까지도 그 바위를 두드리며 묘순아 무엇이 원수냐? 하고 물으면 콩밥이 원수지! 하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 임존성 전투
서기660년 7월18일 사비성에서는 나당군의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신라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은 당하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서부 세력을 거느리고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이 전승축하연 이후 사비성을 탈출하여 1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으로 들어가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가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섰다가 왜 이탈하여 부흥운동의 기치를 들게 되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하다.
웅진성으로 도피해 있던 의자왕이 항복한 것은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된 후 5일이 지난 7월 18일이었다.
그것도 웅진방의 영군을 데리고 웅진으로부터 와서 항복한 것이었다. 이에 흑치상지를 비롯한 여러 지방 성주들의 동참이 뒤따랐다. 이는 백제와 당나라 사이에 어떤 타협이 성사되었음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하기 전에 백제는 상좌평을 시켜 많은 음식을 보냈는데 소정방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왕의 서자가 6명의 좌평과 더불어 나와 죄를 빌었으나 정방이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다.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에 나서게 된 동기가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전>"는 데 있었음을 고려하면 당군이 의자왕을 포로 취급을 하고 약탈을 자행한 것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랐음을 말해준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복신,도침과 함께 나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백제의 의병들은 남잠성과 정현성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8월 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뜨리고 물러섰다.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 임존성은 주류성(한산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부안, 홍성 등이 제기되고 있음)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게된다.
의자왕의 사촌인 복신과 승려도침, 지수신 그리고 흑치상지등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세력들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한때 크게 기세를 떨쳐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풍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고(662.5), 사비성, 웅진성 등을 포위하여 주둔하는 당군을 괴롭혔으며, 여러 차례 당군과 신라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은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또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생겨 와해되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켰다.(663) 이때,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가고, 부흥군의 최후의 거점인 임존성을 지키던 흑치상지가 당군에 투항하자 지수신마저 고구려로 망명, 임존성은 663년 11월에 함락되어 4년에 걸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위치 미상)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 남경대 박물관에 보관된 그의 묘비명에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씨(氏)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즉 그의 선조는 백제의 식민지였던 흑치국의 총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남부 월(越)에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치국의 위치를 중국의 남부로 추정하기도 하고 오늘의 필리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복신 도침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으나 부흥운동세력간 내부분열과 당나라 고종이 보낸 사신의 설득으로 항복하여 임존성 공략 때 자신이지키던 이성을 빼앗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가 되고,678년 토번 정벌에, 681년 토번의 잔도 찬파토벌에 참가하였다.
그 뒤 돌궐의 정벌에 나서는 등 공을 세웠으나 그를 시기하는 당나라 신하들의 모함을 받고 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 수덕도령 이야기
오래된 절에는 고유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화라고들 하죠.
수덕사에도 수덕도령에 얽힌 설화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덕산향토지라는 책에는 수덕사에 대한 설화가 실려있는데요.
오늘 수덕사에 대한 설화로 소개시켜 드릴 내용은
바로 덕산향토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수덕도령은 홍주마을에 사는 훌륭한 도령이었습니다.
어느날 사냥터에 갔다가 먼 발치에서
어떤 낭자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거죠.
수덕도령은 낭자가 보고싶어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그 낭자를 수소문한 끝에 낭자의 신원을 알아냈습니다.
어찌보면 스토커 같네요.
낭자의 이름은 덕숭낭자...
하지만, 이름을 알아내면 뭐합니까...
작업을 해도 도통 이 낭자 넘어오질 않는거에요.
청혼을 해도 계속 거절당하구요.
끈질긴 구애 끝에
덕숭낭자도 수덕 도령의 청혼을 허락했습니다.
단!! 덕숭낭자는 조건을 두었습니다.
덕숭낭자 : 저희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주시면 결혼을 하겠어요!
수덕도령은 이후로 절을 열심히 짓기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덕숭낭자를 위해서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만 탐욕스런 맘을 버리지 못해서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나서 그 절이 없어졌다고 하네요...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지만 그마저도 불이나고
마지막으로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지었을 때 절이 완성되었다고 하네요.
그 후 덕숭낭자..
이제 더 이상 튕길 수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승낙했다고 하네요.
덕숭낭자..대체 뭐가 그리 맘에 들지 않았을까요.
결혼은 했지만 수덕도령은 덕숭낭자에게 손도 댈 수 없었습니다.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손에는 한 쪽 버선만 쥐어져 있었다고 하네요.
알고 봤더니 덕숭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충격!!!
그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수덕사가 있는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 수덕사라고 불리우게 됐다고 합니다.
저는 왜 이 설화가 슬프게 느껴질까요.
수덕도령이 불쌍해요.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절인 것 같아요.
■ 원홍장(심청)이야기
■ 의좋은 형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