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시인은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난 오장환시인은 1951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오장환시인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정지용시인에게서 시를 배웠다. 휘문고등학교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교지 《휘문》에 「아침」,「화염」과 같은 시를 발표하고,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어려서 박두진시인과는 안성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일본 지산중학에 유학하고 온 뒤부터는 서정주, 김광균, 이육사시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오장환은 이용악 , 백석과 함께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장환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서정주 유치환과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오장환은 인생의 토대인 식민지 현실, 생명이 발현되는 토대인 이 땅과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파 시인들과 시적 지향이 다르다.
오장환의 시는 리얼리즘 시가 많다. 오장환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은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장시 「전쟁」에서 발견되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두 번째는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다.「성씨보」를 시작으로 「성벽」,「정문」, 「종가」등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반봉건의식이다. 세 번째는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이다. 장시 「수부」는 자본주의화 하는 식민지 근대도시 서울에 대한 비판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는 시다. 네 번째는 당대 농촌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모촌」과 「북방의 길」은 오장환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문학사에서 1930년대 식민지 지배하의 농촌현실과 농민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2006년에 개관한 오장환문학관은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 오장환 생가 옆에 있다. 문학관 안에는 휘문고 교지 《휘문》에 실린 초기 시, 방정환 선생이 만든 《어린이》지《조선일보》등에 발표한 오장환 시인의 동시, 이육사 시인에게 보낸 친필 엽서, 해방 후 중학교 5,6학년 교과서에 실린 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어찌사 오를 것이냐, 꽃가루여 꽃수염이여
해마다 9~10월 오장환문학제가 이곳에서 열리며 백일장, 시그림그리기 대회, 시낭송대회, 문학강연 등이 열리고 있다. 「오장환 시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도종환 시인이 오장환문학관 명예관장으로 있다.
▲ 석탑의 노래; 교과서에 실린 詩
▲ 나의길 ; 휘문고등학교 시절 스승 정지용을 만나 천재시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과정과 월북 후 지병치료를 위헤 입원해 있던 남포적십자병원에서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 오장환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단막극 형식의 영상